[숨] 혀 위에서 만나요
책을 읽다보면 이 작고 가벼운 물체가 뭐길래 사람 마음을 이렇게 뒤흔드는지 경이로울 때가 있다. 책은 고정된 사물이어서 분초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책은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다. 떠다니는 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속도로 헤엄쳐 책의 섬으로 다가오고 이 섬에 모여 작가라는 사공이 젓는 배에 오른다. 그 뒤로 얼마나 유장한 풍경이 펼쳐지는지는 실제 책을 읽은, 독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안다.
얼마 전 19회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책이 이끄는 절경을 보았다. 100여명의 동승자들만 누리기엔 아까운 순간이었기에 고정된 활자로 남겨보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2020년 가을쯤 나는 정용준의 신간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흥미롭게 읽으면서 캐나다의 시인 조던 스콧이 쓴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그림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었다. 한 권은 소설, 한 권은 그림책이지만 독자인 내 마음에서는 하나의 결로 합류하며 읽혔다. 공통적으로 이른바 유창성 장애라고 부르는, 말 더듬는 어린이가 느끼는 경험을 다뤘는데 이것이 작가 자신의 일이기도 했던 것까지 서로 닮아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상대의 작품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고 아직 모른다면 이후 만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와우북페스티벌에서 대담이 실현된 것이다.
자전적인 경험을 글로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두 작가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그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느끼는 불안은 대부분 그 경험을 둘러싼 막연함에서 온다. 글을 쓰는 일은 그 막연함을 걷어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쓴 소설 속 이야기는 분명 거짓이지만 그간 설명할 수 없었던 작가 자신의 마음에 대한 뚜렷한 진실이기도 한데 독자의 직관이 그것을 읽어낸다고 했다.
정용준 소설가는 더듬는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발음하기 힘든 낱말이 떠오를 때마다 좀 더 수월하게 발음할 수 있는 다른 낱말로 문장을 도치하곤 했던 날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가 수행해온 분연한 발화의 노동이 소설가의 문장을 갖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 조던 스콧은 대학시절 자신의 시를 남들 앞에서 읽어야 할 때마다 오늘은 깜박 잊고 시를 쓴 종이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하며 발표를 미뤘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지도교수가 “네가 제출한 시를 내가 출력해왔으니 지금 읽어보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동료들 앞에서 더듬더듬 시를 읽었다.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교수는 눈물이 가득 차오른 채로 그를 보며 자신이 들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낭송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던 스콧은 이날 처음 ‘더듬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해준 사람을 만났고 그 경험이 인생을 바꾸었다고 회상했다. 북페스티벌 현장에서 옷감을 짚으며 수놓을 자리를 찾는 손가락처럼 드문드문 끊기던 조던 스콧의 목소리는 실로 음악이었다. 그는 읽는 행위야말로 호흡을 동원하는 온몸의 노동이며 마법 같은 일임을 듣는 우리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각자의 벼랑에서 말을 끌어올려야 하는 발화 노동자들, 더듬는 자들이다.
마이크를 든 한 관객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선택적 함구증을 지니고 살아온 중년 여성이었는데 이들의 책을 읽고서 오래도록 갇힌 상태에서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고백했다. 조던 스콧은 자신의 시 ‘동굴 탐험’에서 “우리는 모두 혀 위에서 만날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 그렇다. 책은 생각한 것보다 더 좁은 곳에 광대한 빛의 광장을 숨겨두고 있다. 실질적인 노동으로서의 책 읽기가 그 광장에서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항해하고 나아간다. 문학의 위기를, 책의 침몰을 말하는 분들을 그 광장으로 모시고 싶다.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들과 혀 위에서 만나고, 혀 위에서 춤추고 싶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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