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멋진 언니들의 향연
‘미친 과학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하얀 가운을 입고 색색의 플라스크에 둘러싸인 백발의 노인. 그 모습이 흔히 미디어에서 그려왔던 과몰입 연구자의 특징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닥터 브라운, <미니언즈>의 네파리오 박사, 만화 <아톰>의 박사님도 딱 그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별칭에 새로운 모습이 덧씌워졌다. 똑똑하고 생기 넘치고 열정적인 젊은 여성. 좁고 답답한 감옥을 개인 연구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우라, 도구가 부족하면 종이를 찢어 대신하고, 잠을 포기한 채 결과물에 매달리는 집념까지, <데블스 플랜>의 이시원은 똑똑한 여자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집요하게 추적하고, 단호하게 나아가고, 깔끔하게 책임지는 모습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데블스 플랜>은 서동주의 재발견이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예술에서 순수학문, 법학까지 아우르는 그의 화려한 학력들을 보면서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 사람인가보다 부모의 재력을 먼저 떠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출연자 전원이 힘을 합쳐야 하는 암기 미션을 거짓말처럼 혼자서 뚝딱 해치워버리고는, 후에 주변의 감탄을 거부하거나 민망해하지 않고 익숙한 듯 재치 있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그가 겸손이 몸에 익은 진짜 능력자였음을 알아버렸다. 우승자가 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용기도 멋있었다.
오랜만에 방송에 나온 박경림도 반가웠다. 한때 발랄하고 엉뚱했던 최연소 연예대상 수상자가 심지어 관록을 갖추면 저런 모습이구나 싶어 동년배 여성으로서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진행요원에게 작은 소품 하나를 건네받을 때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거나 한참 나이 차 나는 다른 출연자들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는 모습에서 품격이 보였다. 예전부터 인맥 넓기로 유명했는데 다른 출연자들의 감정을 다독이고, 챙겨주고, 도와주는 모습에서 사람 대하는 노하우가 얼마나 성숙한 노련미에 기반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세수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얻은 조연우는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감방에 갇혀서도 아이돌과 하룻밤을 갇혀 있게 될 줄 몰랐다고 미소를 지어 한없이 귀엽다가도, 비록 생존을 담보로 할지라도 승부를 걸어야 할 때를 알고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하는 모습으로 그가 왜 프로기사인지 보여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영어로 진행하는 바둑채널을 운영할 만큼 능력자였다. 게다가 평소 사범님 소리를 듣는 프로기사지만 마스크 하나만 쓰면 아가씨가 되어버리는 기원의 세계에서 할아버지들과 둥글게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나 ‘내가 술만 안 먹었으면’으로 시작하는 아마추어의 허세에도 조금도 불쾌한 티 하나 없이 어르신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편안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의 화법에 마음이 끌려 그 사람도, 바둑도 자꾸 더 알아가고 싶어졌다.
저격과 뒷담화, 짜릿한 한 방이 넘쳐나는 쫄깃한 서바이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데블스 플랜>은 추리물치고 다소 심심한 프로그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떠랴. 내가 미처 몰랐던, 잠시 잊었던 멋진 언니들이 이렇게나 한가득 나오는데. 똑똑하고 젠틀하고 강단 있으면서도 스윗한 이 언니들이 다 흥하기를, 그리고 또 다른 원석들이 더 많이 발굴되기를.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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