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진의 막전막후] 낙타를 매어둬야 하는 이유

홍혜진 기자(honghong@mk.co.kr) 2023. 10. 2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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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와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화두는 건전재정이었다. 각국 부채 상환 부담이 크게 가중된 상황에서 개최된 재무장관회의인 만큼 당연히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고금리 기조의 장기화 가운데 그간 늘어난 정부지출과 부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게 주요 20개국 재무장관들이 내린 결론이다.

한국 나랏빚은 2017년 600조원대에서 5년 만인 작년 말 1000조원대로 60% 이상 급증했다. 지금은 더 불어나 1100조원을 '훌쩍' 넘겼다. IMF는 이대로라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현재의 비기축통화국 4위에서 2028년 2위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한다. 마라케시에서 만난 크리슈나 스리니바산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은 한국 재정 상황에 대해 "한국은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더 늘지 않도록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엄중한 경고를 했다.

이런 정부부채와 재정적자 증가 속도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정부 재정은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자 최후의 보루다. 부채가 늘고 재정이 바닥난다는 것은 이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같다.

IMF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빠르게 위기를 극복했던 것도 아껴뒀던 재정 덕분이었다. 정부는 당시 국채를 찍고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동원해 IMF 구제금융 상당분을 갚았다. 당시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11%로 낮아 빚을 더 낼 재정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은 50% 이상으로 국가채무 비율이 당시의 5배에 달한다. 지금처럼 부채가 계속 증가한다면 앞으로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정부가 돈을 풀어 경제를 떠받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부채 증가는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고 국제사회에서 돈을 융통하기도 어려워진다. 경제위기 때 정부가 안팎으로 손발이 묶이는 재난적 상황을 막기 위해 재정 여력을 비축해 놔야 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건전재정 기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재정 효율화에 돌입한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국가채무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늘어나지 못하게 제한하는 재정준칙은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 소위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수년째 공회전하고 있다.

마라케시에서 회의를 취재한 뒤 돌아오는 비행기 안은 비좁았다. 모로코에서 튀르키예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올 때 비행시간은 15시간으로 길었다. 좁은 자리에 한동안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모습이 재정 여력이 동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재정당국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모로코 속담에 '신을 믿되 낙타는 잘 매어두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잘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되 문제가 생기지 않게 스스로 대비하라는 의미다. 선거를 통해 집권하려는 정치세력은 돈을 쓰고 인심을 퍼주는 게 본능이다. 정치 재량에 매번 재정을 맡기면 결국 돌아오는 건 재정적자와 미래 세대의 부담 증가다. 한국 국민과 정부의 저력은 믿되 재정준칙을 도입해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재정을 견고하게 운용할 틀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낙타가 도망가지 않는다.

[홍혜진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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