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팔고 엔화 사자"… 2030도 큰손들도 '환테크' 바람
평소 재테크에 관심이 많던 A씨(32·회사원)는 지난여름 일본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경비 100만원을 엔화로 환전했다. 그리고 여행경비와 별도로 200만원을 추가 환전했다. 엔화값이 8년 만에 100엔당 800원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적어도 100엔당 1000원까지 강세로 돌아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A씨는 원화 대비 엔화 강세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에 더해 달러값이 언젠가는 빠질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100엔당 800원 선에 원화를 엔화로 환전한 데 이어 2개월이 지난 9월 말에는 A씨는 갖고 있던 100달러도 원화로 환전한 뒤 다시 이를 엔화로 환전해 엔화 예금으로 입금했다.
은퇴를 하고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B씨(63)도 환테크에 뛰어들었다. B씨는 작년 10월 달러 가치가 급등했던 것을 교훈 삼아 올 2월부터는 엔화를 사들이고 있다. B씨는 2월 이후 3개월간 원화 300만원 이상을 엔화로 환전해 외화예금 통장에 보관 중이다. 올 7월부터 떨어진 엔화 가치가 연말까진 반등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최근 강달러·약엔화로 '환테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에 힘입어 값이 오른 달러화를 팔아 차익을 실현한 뒤 기존보다 저렴해진 엔화를 구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수출기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달러로 수출대금을 받는 수출업체도 달러가 비쌀 때 원화로 환전해 환차익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달러당 원화값이 떨어지는 강달러 현상을 보이면서 기업과 개인의 달러화 예금 잔액이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월별 달러당 원화값(매매기준율)은 올 2월 1219.3원으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고 이후 등락을 거듭하며 1350원대까지 내려갔다. 강달러로 인해 달러 값어치는 올라가고 원화의 가치는 떨어진 것이다. 반면 엔화값은 지난 4월 100엔당 1000원에서 900원대까지 미끄러졌다. 원화가 달러 대비로는 값이 싸졌지만, 엔화 대비로는 비싸졌다. 통화별 가치로 보면 달러>원>엔 순으로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시중은행의 달러화 예금 잔액과 엔화 예금 잔액 증감률도 환율 변동에 맞춰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달러화 예금 잔액은 7월 소폭 늘어났다가 8~9월 줄어들었다. 특히 9월에는 전월 대비 감소율이 -13.5%로 올해 들어 가장 컸다. 4대 시중은행(KB국민·우리·신한·하나)의 총 달러화 예금 잔액은 올 7월 573억9000만달러에서 8월 552억900만달러, 9월 477억6200만달러까지 급감했다. 3개월간 총 100억달러 가까이 급감한 것이다. 반면 엔화 예금은 7월 9381억2700만엔, 8월 9537억6900만엔에서 9월 9885억1300만엔까지 늘어났다. 달러 예금이 급감하는 기간 엔화 예금은 500억엔 이상 증가했다.
염수인 하나은행 군자역지점 PB팀장은 "요즘은 엔화값이 900원대로 내려앉으면서 환차익을 위해 엔화를 사는 손님이 증가했다"며 "엔저 현상으로 일본 여행이 증가해 엔화를 미리 구입하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기존엔 20·30대들이 단기적으로 환차익을 노리고 엔화를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액 투자로 환차익을 소소하게 누리기 위해서다. 반면 최근에는 이 같은 엔화 사재기에 자산가들도 가세했다. 엔화 매입에 따른 환차익 기대감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방증한다. 안소영 하나은행 구로역VIP클럽 PB팀장은 "역대급 엔저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VIP 손님들도 엔화 투자를 시작했다"면서 "엔화도 달러와 마찬가지로 원·엔 환율이 하락할 때 분할 매수하고 환율이 오를 때 분할 매도하며 수익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안 팀장은 "단기적으로 달러 상품으로 환율 변동에 대비해 DLB(기타파생결합사채)나 달러 RP(환매조건부채권), ELT(주가연계신탁) 등으로 자산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투기성' 엔화 매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장기 투자를 원하는 금융소비자에겐 '엔화 구입 타이밍'을 노려 환차익을 얻는 투자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환율 전문가인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기본적으로 엔화 강세를 전망해 투자하는데 일본의 통화 정책 변화 가능성이 제한적"이라며 "추세적으로 강세를 갈 경우에도 수익 실현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단기적 측면에선 수익성 제고가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안 팀장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단기적인 환테크보다는 상대적으로 장기적 채권 투자를 권유한다. 안 팀장은 "고물가, 전쟁 등으로 올 4분기까지는 불확실성이 더 커질 전망"이라며 "지금은 3개월 단기채 펀드로 대응하다가 12월 이후 만기가 긴 채권으로 투자하는 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염 팀장은 환테크를 노리는 투자자들에게 채권 투자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환테크는 결국 국가 간 금리 정책 차이에 따른 환율 변화를 노리는 투자다. 상대적 금리 정책 변화에 베팅하는 것보다는 미국의 통화 정책 변화를 감안한 투자가 현명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내년 이후 금리를 내릴 수 있다는 전망은 환테크의 대안 투자 방안을 보여준다. 염 팀장은 "내년 이후 미 연준의 금리 인하에 맞춰 한국도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시기에 발행된 저쿠폰 채권에 투자해 자본 차익과 만기 수익을 노리는 게 우월 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고금리엔 발행 가격보다 낮아진 채권을 매입하면 만기에 높은 매매 차익을 얻을 수 있어 절세 효과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안 팀장은 또한 세계적인 이슈가 생길 때마다 변동성이 확대될 때를 노려 공모주 펀드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는 "증시가 급등락을 거듭하면 향후 투자의 시계도 흐려진다"며 "어지러운 변동성 장세에는 증시 조정에도 덜 조명받는 공모주 펀드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환테크를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특히 제도권 금융에 포섭되지 않는 마진 트레이딩 같은 상품은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상품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에 등록되지 않은 '가짜 금융사'에 투자할 경우 수익 구조와 무관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막막하다. 은행 PB들은 환테크에 나설 경우 시중은행 외화예금 상품 활용을 적극 권유한다. 통화별 예금 금리를 꼬박꼬박 지급하는 것은 물론 환차익에 대해 부과하는 수수료가 낮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별로 가입 시점에 따라 금리와 환율 등 우대 조건이 다르다는 것은 주의점이다. 장기 거래 우량 고객일수록 우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양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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