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포기한 인간이 가장 위험하다
그것 없인 자유 있을 수 없어
나치 부역자 "명령따랐을뿐"
無사유의 전형으로 더 악해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에세이 42편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 가능할까?
20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정치 사상가로 꼽히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를 묶은 '난간 없이 사유하기'가 출간됐다.
이 책은 아렌트의 조교를 지낸 제롬 콘이 아렌트가 46세(1953년)부터 서거 직전인 69세(1975년)까지 남긴 글, 강연, 서평, 대담 등 42편을 집필 순서대로 구성 한 에세이집이다. 이들 에세이에는 아렌트가 집필해 출간했던 저서 '인간의 조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폭력론' 등에 담겼던 사상이 녹아 있다. 26편은 다양한 지면에 실려 이미 발표됐으며, 16편은 처음 출간된 글이다. 책의 제목인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의 정치 사유를 나타내는 대표적 표현이다. 난간은 인간이 사유할 때 기대는 전통적 개념을 의미하며, 난간을 붙들지 않고 사유하는 행위는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하는 행위를 말한다.
난간 없이 계단을 오르는 것은 자유롭지만 위험하다. 난간이 없으면 인간은 계단 밖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아렌트는 진정한 사유가 난간 없이 계단을 오르는 행위와 같다고 주장한다. 위험하더라도 기존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사유해야 인간의 자유와 행복, 삶과 정치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에세이는 고대철학부터 중세철학, 전쟁사와 정치사를 망라하며 전통적 기준을 벗어난 '난간 없는 사유'를 시도한다. "계단을 오를 때 난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전통이 붕괴되고 아리아드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섬의 왕 미노스의 딸)의 실이 끈이 끊긴 사안입니다. 이전에 아무도 사유하지 않은 것처럼 사유를 시작해야 하며, 그런 다음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사유의 위험성도 지적한다. 사유는 대면하는 모든 것에 인간이 대응할 수 있게 하지만 한편으로 기존의 것을 비판하며 해체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무슨 생각이든지 비판적 검토에 부칩니다. 엄격한 규정, 일반적 의견 등 무엇이든 그 기반을 무너뜨리는 작용입니다."
사유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아렌트는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일상을 스치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흘려보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세상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모든 사람이 사유하는 존재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의거합니다. 사유가 위험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 저는 '무사유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아렌트는 사유를 포기한 대표적 사례로 아돌프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나치 부역자들을 제시한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인물로 전범 재판에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한 인물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사유를 포기한 인간은 누구나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을 강조한다. 인종 청소를 하는 행위가 옳은 것인지 스스로 사유하고 제동을 걸지 않은 것이 상관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온 근면한 공직자 아이히만을 전쟁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아이히만에게 사람을 실제로 죽이는 업무가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그가 살인자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에게 이른바 범죄 본능이 전혀 없다 해도 그는 훨씬 더 악한 존재입니다."
편집자 제롬 콘이 쓴 서문과 번역자 신충식이 작성한 해제는 책에 담긴 아렌트의 광범한 사유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문은 아렌트의 사유를 바탕으로 미국 공화정의 쇠퇴 원인, 전체주의의 출현, 아이히만에 대한 분석을 심도 있게 제시한다. 해제는 아렌트 사상의 핵심 주제인 정치 다원성, 판단의 문제를 다뤘다.
유대인인 아렌트가 스승이자 연인이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해 쓴 에세이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이데거는 명저 '존재와 시간'을 남긴 실존철학자로 철학사에 이름을 남겼으나 나치를 지지한 전력으로 종전 후 대학에서 해직되는 등 오명을 남겼다. "하이데거의 저술은 사유의 전범이자 전인미답의 광대한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용기,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에 전적으로 자신을 열어놓는 용기의 전범으로 남을 것이다. 이는 사유의 심오함에 자신을 몰두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다."
사고하지 않는 행위를 경계한 아렌트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일단 '멈춰서 생각해보라'고 강조한다. 아렌트의 이 말은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통념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교훈을 준다.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으면 사유할 기회를 갖기 힘들다. 현대인이 위험할 정도로 사유를 밀고 나가야 하는 이유다. 사유를 포기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김형주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연 10% 적금? 주식 팔고 당장 가입”…2금융권 금리경쟁 ‘활활’ - 매일경제
- “성관계 후 사진, ‘피임증거’ 제출”…‘女직원 임신=회사 손해’ 中로펌 - 매일경제
- “6대 때려 12년, 그냥 죽일 걸”…부산돌려차기男, 반성은커녕 보복 다짐 - 매일경제
- [단독] 국민연금 돈 더 걷어도…2068년 기금 고갈 못 피한다 - 매일경제
- ‘세계 1위’ 오명, 유독 한국인 괴롭히는 이 질병…점심 먹고 걸어볼까 - 매일경제
- 전세사기 일파만파에 ‘유탄 맞은’ 이곳...올해 3조 적자 공포 - 매일경제
- 더 높이 올라간 건 SK하이닉스인데 삼성이 세레모니 한 이유 [위클리반도체] - 매일경제
- 마라톤 풀코스 뛰겠다는 안철수…‘이것’ 의식한 정면돌파? - 매일경제
- 대통령실 비서관 ‘자녀 학폭’ 의혹…野 “리코더로 때려 전치 9주” - 매일경제
- ‘시즌 아웃’ 네이마르 “인생 최악의 순간” 십자인대파열에 좌절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