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처럼 톡 쏘는 액션, 주먹왕들 이야기에 심장이 뛴다
맨손으로 선 주인공이 10명이 넘는 악당과 격투를 벌인다. 포위되지 않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체를 'U'자 모양으로 흔드는 위빙, 좌우로 고개를 숙이는 더킹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한다. 미처 피할 여유가 없게 들어오는 공격은 팔뚝과 팔꿈치, 손으로 만든 가드로 단단히 막는다. 상대의 복부, 명치, 턱과 안면에 주인공의 주먹이 꽂힐 때 울리는 타격음은 일상에 지쳤던 관객의 가슴을 강타한다.(넷플릭스 드라마 '사냥개들')
드라마 '사냥개들'과 영화 '범죄도시3' 등 복싱 액션 콘텐츠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신작 제작이 이어지고 있다.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해온 한국 콘텐츠의 액션 연출이 눈이 높아진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화끈한 타격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줬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복싱은 올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도 동메달 1개에 그치는 등 수십 년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일 영화계에 따르면 '코리안 호크' 장정구 전 세계챔피언의 실화를 그린 영화 '산복도로'가 지난 7월 촬영을 마치고 올해 말 공개될 예정이다. 김시우 감독이 연출하고 이호원·도지원·안내상 배우 등이 출연하는 '산복도로'는 싸움만 일삼던 부산 공동묘지 위 빈민촌 소년들이 복싱 챔피언, 조직폭력배, 사업가, 검사 등으로 성장하는 여정을 담았다.
아마존오리지널 영화로 제작되는 '너클걸'도 공개를 앞두고 있다. '너클걸'은 복싱선수가 범죄조직에 납치된 여동생을 구하려고 불법 격투에 참여하는 범죄액션물이다. 한국, 일본, 대만 등에서 인기를 끈 동명의 웹툰이 원작이며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제작한다. 영화 '표적'의 창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공 란 역은 일본 배우 미요시 아야카가 연기한다.
오는 25일 개봉하는 '용감한 시민' 또한 복서 출신 기간제 여교사가 가면을 쓰고 불의를 바로잡는 내용을 다룬다. 원작 웹툰에서 합기도 선수 출신이었던 주인공의 설정은 영화에서 복서 출신으로 바뀌었다. 연출은 영화 '너는 내 운명' '그놈 목소리'의 박진표 감독이 맡았고, 주인공 소시민은 신혜선 배우, 악역 한수강은 이준영 배우가 연기한다.
복싱 액션물의 신작 제작이 이어지는 것은 올해 복싱 액션 콘텐츠가 흥행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석도가 복서 출신이었다는 전력을 시리즈 최초로 드러낸 '범죄도시3'가 지난 5월 개봉해 관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고, 6월 공개된 드라마 '사냥개들'은 넷플릭스 글로벌 랭킹 1위(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 기준)를 기록했다.
복싱 액션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것은 한국 콘텐츠의 액션 연출 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산복도로'에 참여한 이태영 무술감독은 지난해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에미상 스턴트퍼모먼스상, 미국 배우조합상 스턴트 앙상블상을 받았다. '용감한 시민'에 참여한 허명행 무술감독 역시 '범죄도시'에서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섬세한 복싱 액션을 보여주는 등 액션 연출을 고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짝패' '베테랑' '밀정' 등에 참여하며 한국 액션 영화를 선도해온 정두홍 무술감독은 "최근 영화 액션을 디자인하는 젊은 세대의 창작력과 테크닉은 놀라울 정도이고 할리우드에서도 한국의 액션물을 많이 참조한다"며 "예전과 달리 규제가 완화돼 생각을 가두는 울타리가 사라진 것도 연출 역량 발전의 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복싱 전문가들도 실제 경기에서 사용되는 기술이 액션 콘텐츠에서 실감 나게 구현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신종훈 선수(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는 "연타를 할 때 앞 손으로 상대의 가드를 들추고 타격을 하는 모습(범죄도시3) 등 실전 기술을 디테일하게 구현한 장면이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복싱을 생활체육으로 배우는 인구가 늘어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액션을 '알고 보는' 사람이 늘면서 액션물의 인기가 높아진 것이다. 한국권투인협회(KBI) 생활체육대회에서는 매달 초등부부터 50대부까지 200여 회의 토너먼트 경기가 열린다. 차도르(구독자 76만명), 매미킴TV(65만명) 등 유명 선수의 움직임을 분석해주거나 복싱 기술을 알려주는 유튜브 채널도 성행하고 있다.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경기 침체, 이념·세대·성별 갈등으로 억눌린 대중에게 타격감 있는 액션이 쾌감을 주는 것이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대중의 욕구를 반영한다"며 "불황으로 삶이 팍팍하고 사회 갈등이 많을 때 대중은 시원한 액션과 권선징악 서사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말했다.
복싱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반면에 현실의 한국 복싱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 복싱은 홈에서 열렸던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금 2, 은 3, 동 1)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못 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92㎏급 정재민 선수가 동메달 1개를 획득하며 체면치레했지만 복싱은 다른 종목에 밀려 중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라운드가 길고 부상 위험이 높은 프로복싱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국내 경기 대전료가 20만~100만원에 불과해 선수층이 사실상 붕괴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한국 복싱이 침체에 빠진 것이 망가진 복싱 시장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러 단체가 난립하고 선수에게 줄 대전료를 착복하는 등 부조리가 일상화되며 생태계가 무너졌다는 설명이다. 이에 기량이 좋은 아마추어복서들이 프로 전향을 하지 않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변정일 전 세계챔피언(전 서울올림픽 국가대표)은 "프로복싱 대전료는 1980년대 책정된 금액이 현재까지 동결돼 있다"며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힘든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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