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 조명 옆, 말풍선 하나 …"내 작품은 흑백 아닌 회색지대"
내달 11일까지 갤러리바톤서
공장에서 막 출고된 듯한 알루미늄 조각이 희붐하게 빛을 뿜어낸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결합한 이 라이팅 부조(浮彫) 옆에 말풍선이 그려졌다. 낙서인지 기호인지 알 수 없는 드로잉은 말풍선의 기능인 의미 전달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2021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던 리엄 길릭 작가(59)가 농담 같은 전시로 돌아왔다. 갤러리바톤은 11월 11일까지 신작 20여 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변화의 주역들(The Alterants)'을 연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내게도 모든 예술가처럼 본능과 지성 사이의 지속적 다툼이 있다. 말풍선은 스스로를 놀리는 것이다. 불가능한 추상적 예술의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술, 출판, 디자인, 전시 기획, 미술 비평 등 다방면에 걸친 작업 세계를 열어온 작가가 새롭게 주목한 건 국제적 그림 기호인 아이소타이프(ISOTYPE)다. 말풍선에 그려 넣기도 하고, 독립된 평면으로도 선보인다. 평면 작업은 최소한의 잉크로 인쇄돼 기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아이소타이프는 예술이 아닌 정보의 공유를 위해 탄생했다. 심벌을 다시 예술화하는 접근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라이팅 부조는 재료 본연의 색채를 지닌 정교한 물성의 긴 육면체와 건조한 백색광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복잡한 정밀기기와 컴퓨터의 군집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I), 바이오메디컬, 가상현실 등 포스트 산업 시대의 예술을 고안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진짜 예술은 구조물이나 그래픽이 아닌 중간의 '빛'이다. 이것만이 진정한 예술이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확실성을 배제하면서 계속 불확실성을 시도해나가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라고 설명했다.
영국 출생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길릭 작가는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 작가로 선정됐다. 내년 9월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니콜라 부리오가 주창한 '관계 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예술이 일상에 개입하는 순간과 예술이 사람들의 행동이나 환경에 미치는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관계 미학이 구현된다. 이것이 미술인지, 무슨 뜻을 담았는지 답을 찾기 쉽지 않다.
작가는 "내 관심사는 언제나 확실하고 정의된 것이 아닌, 흑과 백이 아닌 회색 지대였다"며 "현대미술가라는 직업이 뭘까, 원천적 고민을 많이 했다. 현대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직업이다. 내 역할은 중세시대 시인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허술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구현 과정은 치밀하다. 1987년 이후 그림을 그리지 않고 컴퓨터로 작업해온 작가는 전시장을 3D 모델링해 작품 배치를 세심하게 조율했다. 이번 신작들은 앞으로의 작업을 위한 단초이기도 하다. "내게 전시는 결과물이 아닌 과정이다. 해외 작가들이 서울에 와서 전시만 보여주고 떠나지만, 나는 그런 걸 지양한다. 여기에서 얻은 영감으로 다른 걸 생산할 것이다. 이번 전시는 나를 위한 것이다."
[김슬기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연 10% 적금? 주식 팔고 당장 가입”…2금융권 금리경쟁 ‘활활’ - 매일경제
- “성관계 후 사진, ‘피임증거’ 제출”…‘女직원 임신=회사 손해’ 中로펌 - 매일경제
- “6대 때려 12년, 그냥 죽일 걸”…부산돌려차기男, 반성은커녕 보복 다짐 - 매일경제
- ‘세계 1위’ 오명, 유독 한국인 괴롭히는 이 질병…점심 먹고 걸어볼까 - 매일경제
- [단독] 국민연금 돈 더 걷어도…2068년 기금 고갈 못 피한다 - 매일경제
- 대통령실 비서관 ‘자녀 학폭’ 의혹…野 “리코더로 때려 전치 9주” - 매일경제
- 더 높이 올라간 건 SK하이닉스인데 삼성이 세레모니 한 이유 [MK위클리반도체] - 매일경제
- 전세사기 일파만파에 ‘유탄 맞은’ 이곳...올해 3조 적자 공포 - 매일경제
- 마라톤 풀코스 뛰겠다는 안철수…‘이것’ 의식한 정면돌파? - 매일경제
- ‘시즌 아웃’ 네이마르 “인생 최악의 순간” 십자인대파열에 좌절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