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계속하면 GDP 생산인구 소멸할 수 있다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계 지정학과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전쟁 피로감은 높아지고 무고한 피해도 늘어나고 있지만, 종전이나 평화 회복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미·중 전략 경쟁도 조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러·우 전쟁과 미·중 경쟁은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 사안을 포함해 세계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합리적인 선택을 도모해야 할 까닭입니다.
이에 창간 22주년을 맞아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외교광장 및 평화네트워크와 함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을 주제로 토론회를 마련했습니다. 아래는 이날 토론회 발표를 맡은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발표문 전문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을 바라보고 있다. 통상 전쟁 개시 한 달 안에 평화협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전쟁이 10년을 넘어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고 한다. 이 전쟁이 그렇다. 발발 한 달여 쯤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르렀던 협상이 돌연 중단된 후, 현재 어떤 대화나 타협도 난망하며,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은 지금이라도 멈춰야 하며, 하루라도 빨리 평화협상이 개시되어야 한다. 3차대전도, 핵전쟁도 큰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민 90%, 영토 양보 절대 불가'란 통계 뒤에 가려진, 아무도 제대로 전해주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참상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국가 존립이 위험한 상황이다.
촘스키는 이 전쟁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우크라이나인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 단, 우리는 가지 않는다." 만일 푸틴이 지구 정의를 위해 어떤 희생이 따르든 척결해야 할 거대한 악이라면 세계가 함께 나설 일이다. 정의는 구현해야겠고, 핵전쟁은 무섭고, 하여, 대신 돈을 퍼주고 무기를 들려주며 그 모든 짐을 우크라이나 국민에 지우는 것은 가혹하고 비겁하다. "호전적인 전쟁 독려는 '관람석'에서 할 일이 아닌 것"(하버마스)이다.
하물며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는 그 자체로 반인도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전쟁 후 발리바르 류의 '평화주의 포기' 선언(무기 지원 찬성)을 하버마스가 '그룻된 전향'으로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시 전쟁 중단과 평화협상 개시. 이 글은 이를 호소하고 설득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을 포함해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이 전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시대착오적인 신냉전 부활의 최전선에 내몰린 우리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1. 근거 있는, 그러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
전쟁 발발 직후 바이든이 이 전쟁을 "근거 없고(unprovoked) 정당화될 수 없는 공격"으로 규정한 후, 서방 언론은 '근거 없음'의 '근거'로 '제국 부활 내러티브'를 소환했다. 이 전쟁의 목표가 러시아의 제국적 확장, 또는 보복주의(revanchism)에 있다는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라는 푸틴의 유명한 발언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빈번히 인용되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번 전쟁이 소련 제국을 복구하려는 푸틴의 오랜 욕망과 기획의 결과였을까. 이미 전쟁 전, 소련 당시의 영토 회복을 위한 '현상 변경'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크림반도를 제외하고) 푸틴이 이를 시도한 경우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지아의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공화국, 그리고 돈바스가 대표적이다.
조지아의 두 친러 공화국이 조지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한 것은 소련 해체 직후였다. 하지만 푸틴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조지아의 나토 가입 가능성이 현실화한)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 직후 발발한 러-조지아 전쟁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도 독립을 인정했을 뿐 남오세티야공화국의 요청에도, 더구나 그 반쪽인 북오세티야공화국이 일종의 분단국으로 러시아 내 존재함에도, 전쟁까지 불사했던 푸틴은 합병을 시도하지 않았다.
돈바스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이 분리독립을 선언한 것은 크림합병 직후인 2014년 5월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푸틴은 크림과 달리 돈바스의 두 공화국에 대해서는 합병은커녕 분리독립 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푸틴이 그들의 독립을 인정한 것은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2022년, 이번 전쟁 개시 3일 전이었다. 만일 푸틴이 소련 부활의 집요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간 여러 차례 주어진 현상 변경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서방과 달리 러시아는 '근거있음'(provoked)을 강력히 주장해왔다. 전쟁을 일으키지만 않았다면, 나름 곱씹어볼 만한 불만들이다. 첫 번째로 나토 팽창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 유명한 '1인치 발언'에도 나토는 지난 30년간 끊임없이 세를 불려왔다.
여기서 핵심은 약속의 유효성이나 구속력 여부가 아니다. 제국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자발적' 해체까지 감행하며 냉전적 대결을 끝내고자 했던 당시 러시아인들,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정신에 대한 배반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참을 만큼 참았다. 유감 표명과 추가 확대 금지를 요청했을 뿐이다. 사실 저항할 힘도, 겨를도 없었다.
나토 팽창에 러시아가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이에 연루되면서부터였다. 마침 유가 고공행진으로 국력도 회복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푸틴뿐 아니라 러시아 엘리트층 전체에게 모든 레드라인 중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라인이라는 것은 얼간이도 아는 사실'이라고, 주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현 CIA 국장 윌리엄 번스는 말했다. 그 이유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나 다음 발언을 통해 역지사지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만일 중국이 군사동맹을 만들어 캐나다와 멕시코를 끌어들이려 했다면, 우리 미국은 가만히 있었겠는가."(미어샤이머)
두 번째로 돈바스 내전과 러시아계 주민 보호 문제.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돈바스의 두 공화국은 2014년 5월 분리독립 선포 이후 '크림의 길'을 따라 러시아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푸틴은 합병 대신 외교적 해법을 고집했다. 이는 돈바스 내전의 결과 2015년 2월 맺어진 민스크 협정 준수를 의미하는바, 협정의 핵심은 '두 공화국은 우크라이나에 남고, 우크라 정부는 이들에 자치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크라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내전이 재개되어 이번 전쟁 직전까지 7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특히 내전 초기, 친러 분리주의 반군 소탕을 목적으로 결성된 아조프 민병대는 반데라주의(우크라이나 나치즘)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며 각종 잔혹행위와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조프는 이후 우크라이나 정규군에 정식 편입되었다.
한국에는 '8년의 내전 기간 우크라 네오나치에 의해 1만 4400명의 러시아계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다. 관련 수치는 러우 '양측'의 '군민' 사망자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즉, 4400명은 우크라 군 사망자, 6500명은 친러 반군 사망자로 민간인 희생자는 3404명이다.
하지만 그 수가 몇이든, 1) 돈바스의 러시아계 주민이 네오나치의 폭력에 노출되어있었던 것, 2) 그럼에도 우크라 정부가 유엔 안보리도 인정한 민스크 협정을 지키지 않은 것, 3) 특히 돈바스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하며 친러 동남부 주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 당선된 젤렌스키가 취임 후 돈바스 자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한 것, 4) 그럼에도 푸틴이 합병이 아닌 정전 협정 준수라는 외교적 해법을 전쟁 직전까지 일관되게 요구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번 전쟁의 경우도 푸틴은 막판까지 외교적 해결을 위한 시도를 했다. 전쟁 직전인 2021년 12월 15일, 2023년 2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 푸틴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 협상을 제안했다. 당시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우크라가 병력과 중화기를 돈바스 전선에 집결시키면 러시아는 우크라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불러 모아 세를 과시하는 상황이었고, 군사적 긴장은 날로 고조되었다.
대결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러시아가 제안한 협정안은 1) 우크라이나 포함, 나토의 추가 확장 금지, 2) 민스크 협정 준수 및 돈바스 공화국의 특수 지위 보장, 3) 1997년 <나토-러시아 기본 협정> 이전으로 나토 군 자산 복귀 등, 전쟁 발발 후 실제 협상 테이블에 올라왔던 의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당시 바이든과 나토가 푸틴의 최후통첩에 일말의 성의라도 보였다면, 전쟁이라는 비극 없이도 동일한 사안에 대해 협의할 수 있었던 셈이다.
촘스키가 '러시아의 침공이 범죄행위임은 분명하지만, 이는 확실히 도발된(provoked) 것이며, 그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고 한 것, 좌파도 아닌 미어샤이머 역시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도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그가 왜 그랬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이런 배경을 가진다.
푸틴의 침공 개시 연설도 러시아의 마지막 노력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된다. 즉, 최초의 약속으로 돌아가자는 최후의 호소마저 무시당한 마당에 '러시아는 자국 안보를 위해 조치를 취할 전적인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전적인 권리'란 누구에게도 없다. 오히려 침공은 푸틴의 모든 명분을 근저에서부터 허물어뜨렸다. 하지만 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인 것은 맞지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막을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2. 신냉전은 정말 현실인가 :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의 동상이몽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에 왜 근거 여부를 따지고 있는가. 러시아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근거 있음과 정당화될 수 없음의 기이한 공존'으로 인해, 1) 이 전쟁에 대한 평가가 나라마다 다르고, 2) 그 판단이 '국익' 변수와 어우러져 미-러 양국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며, 3) 그것이 작금의 세계질서에 반영되어 이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모두 미국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인구가 훨씬 더 많다.
바이든이 이 전쟁을 '민주주의 vs 권위주의' 간 '가치의 전쟁'으로 규정한 후 '신냉전 도래'의 목소리가 높다. 기존의 미-중 전략경쟁이나, 전쟁으로 극단화된 미-러 대결이 냉전 시기 미-소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양한 차원의 상호의존이 구조화된 세계화 시대는 냉전의 이분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최전선으로 삼은 미-러 간 가치의 전쟁에는 광범위한 중립지대가 존재하며, 아래 <러시아 제재 지도> 속 거대한 회색 공간이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마크 그린이 '바이든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세계를 규합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우리는 소수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나라들은 세계인구의 16%를 대표할 뿐, 세계인구의 3분의 2를 점하는 나라들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거절하거나, 중립을 표명하고 있다.
실제로 제재참여국은 북미와 유럽, 즉 나토 회원국에 대부분 제한되며, 아시아 국가 중에는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뿐이다. 그 외, 동남아나 중앙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중동, 남미,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이 회색지대는 현재 부상 중인 '글로벌 사우스'와 지리적으로 정확히 겹친다. 인도, 브라질, 아세안 등 글로벌 사우스의 대다수 국가는 미국 편도, 러시아 편도 아니다. 사안에 따라, 의제에 따라 미-러 사이를 유연하게 오간다.
미들/스몰 파워'들'의 이러한 비동맹/다자동맹 전략은 글로벌 지정학이 냉전의 이분법으로 고착되는 것을 끊임없이 교란하며, 그 구조를 다극화한다. 이때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가치가 아니다. 국익이다. '인도는 인도 편'이고, '브라질은 브라질 편'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먼저 회색지대의 중심에는 가치의 전쟁에 있어 러시아보다 근원적이고 위협적인 상대인 중국이 버티고 있다. 이번 전쟁에 대한 중국의 표면적 중립 뒤에 미국식 가치의 패권에 저항해온 러-중 연대가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러-중 협력의 밀도는 높아진다. 미국의 대중(對中)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고리인 인도는 러시아 무기 주요 수입국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재의 빈틈을 활용해 값싼 러시아 원유 수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22년 G20 의장국 인도네시아는 서방의 강력한 보이콧 요구에도 러시아의 회의 참석을 관철시켰고, 2023년 의장국 인도는 공동선언문에서 러시아 규탄 문구를 걷어냈다. 러-중 주도의 BRICS는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이란,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6개국을 신규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며 날로 확장 중이다. 가입신청국만 22개였다.
튀르키예는 전쟁 초반부터 중립적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는 한편, 나토 가입을 원하는 핀란드에 자국 쿠르드족 이슈에 대한 양보를 얻어내고,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조건으로 자국의 EU 가입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제재 동참 여부로 드러난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 간 괴리는 전쟁 및 러시아에 대한 평가의 간극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앞서 밝혔듯이, 전쟁 원인과 관련한 미국 전문가들의 주류 입장은 '소련 세력권을 복원하려는 푸틴의 야심'으로 요약된다."(<폴리티코>. 2022.2.25.)
같은 문제에 대해 중동 전문가들은 '러시아를 약화시키려는 서구의 시도'를 1위로, '서방의 러시아 안전 보장 제공 실패'와 '우크라의 나토 가입 시도'를 공동 2위로 꼽았다. '소련 복구 시도'는 4위에 머물렀다(아랍 싱크탱크 Trends Research & Advisory, 2022.3.31.).
전문가가 아닌 시민의 견해는 어떨까. 다음은 지난 2월 22일 유럽연합 10개국과 중국, 인도, 튀르키예, 러시아, 미국 시민 총 1만 9765명 대상으로 유럽외교협회(European 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다.
전쟁 인식이나 해법, 러시아 평가에 있어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 간 현격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향후 세계질서에 대한 판단과 직결되는바, 미국, EU, 영국 시민 모두 다극보다 양극(미-중) 질서에 더 높은 가능성을 부여했다면, 중국인 61%, 튀르키예인 51%, 인도인 48%는 '다극 또는 중국/다른 비서구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예상했다.
즉, (현실의 차원이든 인식의 차원이든) 러우 전쟁 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의 핵심은 신냉전이 아니라, 이를 파열시키는 글로벌 사우스의 움직임이다. 냉전 초기 진영화에 도전했던 반둥 회의가 떠오른다. 그때는 '정신'이었다면 지금은 '실리'고, 그때는 약했지만, 지금은 강하며, 그때는 실패했으나 지금은 지켜볼 만하다.
3. 신냉전 부활을 주도하는 한국: 과연 최선인가
신냉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필요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전선이다.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남북이 또 그 최전선에 있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러시아 편이고, 한국 정부는 확실하게 우크라 편이다. 북중러 연대 외 다른 살길을 도모하기 힘든 북한은 그것이 국익이다.
한국도 그런가. 바로 그런 북한 때문에 한미일 협력 강화가 필수라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 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한국 외교는 균형외교에서 가치외교로, 전략적 모호성에서 선명성으로, 대화에 의한 평화에서 힘에 의한 평화로 확실히 이동했다.
'프놈펜 성명', 한미 '워싱턴 선언',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신/원칙/공약' 모두 이 기조 위에 탄생했다. 외교의 지상과제는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협력 증대로 집중되고, 삼국 간 안보협력은 준동맹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실상 핵보유국인 북한을 상대로 자국 안보를 동맹의 호의에, 미국의 확장억제력에 맡기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우크라의 비참한 현실을 보라. 워싱턴 선언의 '핵협의그룹'이나, '캠프 데이비드 공약' 모두 명칭 그대로 '협의'에 대한 약속이지, 어떤 의무도 구속력도 없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8%가 북한의 핵 공격 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023.09.26.). 정작 미국의 경우, 북한 침략 시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에 찬성하는 미국인은 절반에 불과하며, 이는 캠프 데이비드 공약이 있기 전인 2021년보다 오히려 13%나 줄어든 수치다(<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 2023.10.4.). 무엇보다 핵은 터지면 끝이다. 핵전쟁에 승패가 무의미한 이유다. 사후 지원, 사후 응징이 무슨 소용인가.
지난 9월 13일 북러 정상회담이 세계에 불러일으킨 파문은, 다른 누구보다 한국은, 바로 그 북한 때문에라도, '북중러 대 한미일'의 대결 구도를 피해야 함을 역설해준다. 신냉전 구조를 안착시키려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최선은 똑같이 한미일로 맞서 그 구조를 완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러중 관리로 그 구조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러중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가 앞장서 대결을 부추기고, 우리가 나서서 그들을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다. 사실 러중은 진즉부터 신냉전 비판과 다극화 옹호에 앞장섰던 나라들이다. 그런 러시아가 북러 정상회담으로 신냉전 구도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인 건 다분히 '보여주기용'이다.
북러 정상회담 후 이를 '왕따들의 만남', '전쟁 패배로 다급해진 푸틴이 김정은에게까지 손을 벌린 것'으로 희화화하거나, 북한의 재래식 무기와 러시아의 첨단 군사기술 간 거래가 성사된 듯 흥분하는 보도들이 잇따랐다.
일단 푸틴은 왕따가 아니다. 세계인구의 85%를 차지하는 글로벌 사우스가 제재 불참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러시아와 활발히 교류 중임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둘째로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 영토의 17%를 점령한 상태로, 우크라의 대반격은 사실상 실패했다. 고강도 제재에도 올 2분기 러시아 경제는 플러스 성장(4.9%)으로 돌아섰다. 유럽에 우크라이나 피로가 확산하고, 미국 공화당을 중심으로 우크라 지원 회의론이 거세지는 현재, 시간은 러시아 편이다.
전쟁 1년 동안 러시아의 탄약 소모량은 약 1200만 발, (수비로 돌아선) 2023년 예상 소비량은 700만 발인데, 현재 러시아의 연간 탄약 생산량은 250만 발로 추정된다. 탄약이 부족한 건 맞다. 하지만 공격수인 상대는 더 심하다. 지난 10월 3일 나토 군사위원장 톰 바우어는 탄약 고갈을 호소하며 회원국에 증산을 요청했다. <알자지라>와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의 탄약 생산량은 서방 전체를 합친 것의 7배 수준이다. 다급한 것이 누구인가.
몇십 년 묵은 북한 탄약의 품질이 어떻든, 있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온 세상이 다 알게 떠들 일이 아니다. 북한의 러시아 포탄 지원이나, 한국의 우크라 탄약 지원이나, 모두 정황 증거는 있으나(미 위성사진 및 우크라 군 정보국 발표/미 국방부 유출 기밀문서 등) 당사자들은 부인하는 상태고, 그런 경우 조치나 제재는 어렵다. 따라서 필요하면 하던 대로 은밀히 하면 될 일이다.
ICBM이나 군사정찰위성 관련 러시아 기술의 북한 이전도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이는 러시아가 주도한 NPT 체제나, 러시아도 찬성한 대북 제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어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실제 이번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북러 연대를 한껏 과시하면서도, 협력의 수준과 범위가 국제사회의 의무와 규정을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실질적 핵무력 완성은 러시아는 물론, 특히 중국이 원치 않는다.
따라서 우주산업 기지, 전투기 공장, 군함 건조 조선소 등 메시지가 뻔한 장소만 골라 돌아다니며, 북러 군사협력의 위험성을 보란 듯이 세계에 시전한 이번 정상회담에서 푸틴의 진짜 목표는, 마치 핵처럼, 그 위험성의 (현실화보다는) 억지력에 놓인다.
즉, 푸틴이 '아시아판 나토'로 간주하는 한미일 밀착에 대한 견제, 한국의 우크라 군사 지원 가능성 및 대러 적대시 정책에 대한 경고가 그것이다. 결국 북러 연대의 과시는 '신냉전 굳히기'가 아니라, '굳기 전에' 그 구도를 깨기 위한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에겐 한국이 필요하고, 러시아 국민은 한국을 좋아한다. 전쟁 발발 후 한국 정부의 기민하고 적극적인 제재 동참에도 '미국과 동맹인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이해한다'며 러시아가 먼저 나선 이유다. 한국이 원한다면 북러 정상회담 내용을 기꺼이 공유하겠다고 러시아가 먼저 제안한 이유다. (한국이 거절했다.)
지금 러중이 어느 때보다 친한 듯 보여도, 러시아에게 중국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일본은 2차대전 후 아직도 평화조약을 맺지 못한 영토 분쟁 대상국이다. 한국은 다르다. 한 번도 제국인 적 없는 한국의 저력은 소프트파워에 있다. 충분히 매력적이나 전혀 위험하지 않다. 러시아 국민이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다.
전쟁 전 러시아는 한국의 10위 교역상대국으로, 러시아 극동 교역량 전체의 3분의 1이 한국과 이뤄졌다. 전쟁 전 러시아 자동차 시장 점유율 1위가 현대와 기아차, 핸드폰 시장 점유율 1위가 삼성이었다. 그 시장을 현재 중국이 독점하고 있고, 러시아는 이를 바라지 않는다. 러시아 국민도 '뽀대나는' 한국 제품을 원한다.
이만큼 오는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이래 30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전쟁 당사국도 아닌 우리가, 더구나 이토록 논쟁적인 전쟁에 왜 우리의 30년을 지불해야 하는가.
결국 안보나 경제 모두에 있어 한미일에 올인하며 신냉전 부활에 앞장서는 현재의 기조는 우리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쟁의 비극 앞에 국익을 내세우는 것이 천박한가. 세계가 그렇다. 심지어 미국도, 일본도 그렇다.
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비극이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곳에 가서 '초대형 전후 재건 사업 프로젝트', '최대 70조의 사업 기회' 운운하는 것보다야 훨씬 우아하다. 우리가 해준 것은 또 무언가. 대규모 전쟁물자를 지원해온 나라, 수십만이 넘는 난민을 받아준 나라가 우크라 주변에 수두룩하다. 정말 이익을 원한다면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되, 우크라이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조용히 더 하면 될 일이다.
4. 우크라이나, 이대로 가면 GDP 생산인구가 소멸할지 모른다
6월 5일 우크라이나 독립 싱크탱크 <미래연구소(Ukrainian Institute for the Future)>는 전쟁 후 우크라 인구변동과 관련해 아래의 결과를 발표했다.
통계에 따르면 전쟁 직전 우크라이나 인구는 3760만 명, 전쟁 발발 후 2070만 명이 출국해 1210만 명이 돌아왔고, 860만 명은 아직 유럽 등에서 피난 중이다. 그 결과 현재 국내 인구는 2900만 명, 이 중 노동가능인구는 1200만 명이나 이 중 또 250-290만 명은 실업 상태다. (이는 약 500만 명 규모의 국내 실향민 발생과 관계 깊다.) 결국 현재 약 900만 명이 우크라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이 보고서의 제목, "우크라이나는 GDP 생산인구가 사라질 것이다"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전쟁 후 1년 남짓에 인구의 3분의 1, 약 1300만 명이 피난민이 되고, 이 중 860만 명에 해당하는 인구의 약 4분의 1은 해외에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 국외 피난민의 귀국 희망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 소장 볼로디미르 파니오토에 따르면, 전쟁 직후 90%가 귀국을 원했다면, 현재는 50%에 불과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국외 피난민은 더 늘어날 것이고, 안전한 유럽을 포기하고 귀국을 택할 인구는 더 줄어들 것이다.
파니오토가 '최악의 경우 우크라는 인구의 절반을 잃게 될 것'이며, 이처럼 현재 우크라는 '영토냐 사람이냐'의 딜레마에 빠져있으나, 영토 양보 주장이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이를 논의하기 어렵고, 따라서 정부가 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토로한 것은 이 때문이다(gazeta.ua, 2023.8.23.; unian.ua, 2023.8.24.).
널리 알려진 '영토 양보 절대 불가' 여론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크라 <사회학연구소>의 2023년 6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크라 국민 83.5%가 '크림을 포함한 모든 영토 수복'을 원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여기엔 전제가 따른다. '지난 6개월간 본인과 가족의 삶에 직접적인 전쟁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고 대답한 그룹의 '영토 양보 불가'는 80% 이상이었지만, '많다'를 선택한 그룹에서 이 비율은 50%대로 감소했다. (2023.9.14. 러시아의 유명 반체제인사 이고리 야코벤코와 파니오토 소장의 유튜브 대담).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인구 위기, 영토 양보 등과 관련한 다른 목소리는 우크라 내에서 공론화되기 힘들다. 전시상황임을 고려한다 해도, 현재 우크라 내 반민주적 언론 통제와 탄압의 수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8월 15일 우크라의 대표적 반전 NGO <우크라이나 평화주의 운동(Ukrainian Pacifist Movement)>의 사무총장 유리 셸리아젠코가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 단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평화기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단체인 <국제평화국(International Peace Bureau)>에 의해 '2024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셸리아젠코는 침략을 정당화한 적이 없다. 다만, '당장 전쟁을 멈추고, 강제징집에 맞서는 양식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탄압을 멈추라'고, '자기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절대로 타협 못할 악은 없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 '자기파괴'로부터 현재 우크라 시민들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다. 전쟁 초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하는 우크라 남성들의 긴 행렬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다윗 우크라의 기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180도로 달라졌다.
러우 전쟁이 교착상태에 놓였다고들 한다. 새로운 점령도, 의미 있는 탈환도 없는 상황이기에 영토 면에서는 교착이 맞다. 하지만 현재의 전투는 소모전이고, 소모전의 기준은 영토가 아니라, 병력(casualty exchange rate)이다(미어샤이머, 2023,7,30).
현재 우크라는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총동원 체제가 가동되고 있으나, 사회는 예전의 애국적 열기 대신 제대로 훈련받지도 못한 채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의 '개죽음'에 대한 소문들로 흉흉하다. 남성들은 허위진단서 발급, 불법 출국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징집을 회피하며, 이를 위해 기존의 부패 네트워크를 타고 건당 1∼2만 불의 뇌물이 오간다.
부패는 우크라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다. 2023년 1월만 해도 부패 스캔들로 차관급 4명이 날아갔다. 인프라 시설에 집중된 러시아의 미사일 공습으로 전기도, 난방도 끊겨 국민이 어려움을 겪던 당시, 인프라부 차관은 발전기 구매 관련 뇌물 수수로, 국방부 차관은 최전선 부대 급식비 착복으로, 대통령실 부국장은 인도주의 구호품 (차량) 유용 혐의로, 검찰 부총장은 (성인 남성 출국금지를 어기고)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낸 혐의로 사임, 또는 해임되었다.
8월 11일 젤렌스키는 전국의 지역별 모병 책임자 '전원'을 경질했는데, 뇌물을 받고 징집을 면해준 혐의다. 9월 11일 우크라 싱크탱크 <민주주의 이니셔티브 재단(Democratic Initiatives foundation)>의 발표에 따르면, 국민의 78%가 행정부와 군 지도부의 부패에 대통령의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극우 민족주의 확산과 이와 밀접히 연동된 사회분열이 우크라를 위협하는 더 심각한 문제로 도사리고 있다. 다음은 우크라 파시즘의 상징인 '반데라'에 대한 우크라 국민의 전쟁 전후 여론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Ukraine Rating Group & KIIS).
전쟁 전 31%에 불과했던 반데라 지지율이 전쟁 후 83%까지 치솟았고, 이제 지역별 차이도 크지 않다. 2023년 6월 우크라 <사회학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 국민의 19%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민족주의로 자리매김했다. 전쟁 전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전쟁 전 극소수 정치세력에 한정되었던 극우 민족주의의 사회적 확산을 우려할만한 상황이며, 실제로 현재 우크라는 유럽 극우의 글로벌 허브가 되고 있다.
전쟁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트라우마, 증오와 원한은 파시즘에 더없이 좋은 양분이다. 현재 우크라 국민은 1) 전장의 국민, 2) 후방의 국민, 3) 집을 떠난 국민, 4) 점령지 국민으로 나뉜다. 3)은 국내 실향민과 국외 피난민으로 나뉘고, 후자는 다시 유럽 피난민과 러시아 피난민으로 나뉜다. (전쟁 후 러시아로 피난 간 우크라 국민은 러시아 통계로는 약 500만 명, UNHCR 통계로는 약 280만 명으로 추산된다.)
4)의 그룹 역시 2014년 점령지(크림반도와 돈바스 분리공화국)와 이번 전쟁 후 신규 점령지 국민으로 나뉜다.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분류만으로도 우크라 내 사회통합이 얼마나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일지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분위기는 4개 그룹 사이 공감과 이해보다 상호 비난과 증오가 대세다. 집중적 타깃은 당연히 러시아계 국민이다.
2023년 2월 실시된 <우크라이나 사회조사>에 따르면, 우크라 국민의 37%가 '러시아계 주민은 국민으로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점령지 주민과 관련해서는 국민의 90%가 이들을 상황의 피해자라 인정하지만, 이는 원칙의 차원일 뿐, 사안에 따라 판단은 매우 달라진다.
즉, 점령 정부(러시아)에게 월급을 받거나, 세금을 내거나, (그 지침에 따라 러시아어로) 아이들을 가르친 공무원, 사업가, 교육자의 경우, '형사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민 비율이 70∼50%에 이른다. 우크라 국민의 염원대로 모든 점령지를 수복한다 해도 이 문제는 여전히 심각할 것이며,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회통합은 더 요원한 꿈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 후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고통 받았는지 떠올려보라.
이처럼, 국토의 초토화, 영토 17% 상실, 실패한 대반격, 무기와 병력 고갈,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인구 위기, 부패한 통치 시스템, 땅에 떨어진 국민 사기, 극우 민족주의의 확산과 극심한 사회분열 등, 전쟁을 지속할 이유 하나, 동력 하나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재 우크라이나의 현실이다. 이 전쟁을 당장 멈춰야 하는 이유다.
설령 정말로 우크라 국민 90%가 '영토를 모두 되찾기 전까지 절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외친다 해도 우리가 말려야 한다. 현재로선 그게 정의다. 무기는 제공했으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은 자들의 윤리고 책임이다.
5. 푸틴의 거꾸로 가는 전쟁
전쟁을 멈춰야 할 이유는 러시아 쪽에도 많다. 러시아 국민 대다수가 전쟁과 푸틴에 대해 절대적 지지를 표명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2023년 9월 푸틴 지지율은 80%, 전쟁 지지율은 73%로, 비슷한 수치가 전쟁 내내 큰 변동 없이 이어져 왔다.
이는 앞서 설명한 전쟁의 '근거 있음'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러시아인에게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아닌 미국과의 싸움이며, '악의 축을 호명할 유일무이한 권리를 주장해온 미국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폭넓은 공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전쟁을 계속할 것이냐, 중단할 것이냐'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다음은 이에 대한 러시아 여론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다. (레바다센터, 2023.10.3.)
70%가 넘는 전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전쟁 지속과 관련해서는 찬반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올해 5월 조사 결과를 제외하고 전쟁 중단이 지속보다 항상 높으며, 경향적으로도 전쟁 중단은 증가세, 전쟁 계속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전쟁 명분에 대한 지지'와 '전쟁 지속에 대한 지지'가 일치하지 않는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 국민 역시 '근거 있음'과 '정당화될 수 없음'이 공존하는 이 전쟁의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전쟁 지속에 대한 찬반이 학력, 소득, 연령 변수와 밀접하게 연동된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학력, 고소득의 젊은 대도시 거주자일수록 '전쟁 중단'을, 나이 든 저학력, 저소득의 지방 거주자일수록 '전쟁 계속'을 원한다.
일례로 러시아 Z세대의 '중단:계속' 지지율은 '66:22'로, 전쟁 중단을 원하는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많다. 즉, 알려진 바와 달리, 러시아 내에도 전쟁 관련 국론 분열이 엄연한 현실이며, 사회적 양극화 라인과 단단히 결합된 여론의 양극화는 간과해선 안 될 위험성을 갖는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전쟁을 멈춰야 할 가장 큰 이유는 푸틴이 전쟁까지 불사하며 얻으려 했던 모든 목표가 현재 정확히 반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1) 그렇게 저지하고자 했던 나토는 전후 70년간 중립을 지켜온 스웨덴, 핀란드로까지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로도 팽창하는 추세다. 전쟁 후 처음 열린 마드리드 나토 정상회의는 러시아를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 중국을 '체계적 도전(systemic challenge)'으로 선언하며, 대서양과 인도-태평양, 대러 전선과 대중 전선을 연계시켰다. 2022년 마드리드와 2023년 빌뉴스 서밋 모두에 AP4(아태 파트너 국가: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초대된 것은 이 때문이다.
2) 그렇게 막고자 했던 우크라 나토 가입에 대한 우크라 국민 여론도 완전히 역전됐다. 전쟁 직전 우크라 국민의 나토 가입 찬성률은 48%, 크림합병 이전에는 고작 18%에 불과했다. 현재 찬성률은 86%까지 치솟았다. 즉, 바로 푸틴 자신이 합병으로, 전쟁으로, 나토 가입에 반대하던 우크라 국민 절대다수를 완전히 돌려세운 것이다. 물론 푸틴은 이 전쟁으로 우크라 나토 가입 저지의 목적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여론이 배척하는 결과가 향후 어떤 혼란과 부작용을 낳을지는 자명하다.
3) 그렇게 보호하고자 했던 우크라 내 러시아 동포는 이제 우크라에서 아예 살 수 없게 되었다. 크림합병 이후에도 70%대로 유지되던 우크라 국민의 러시아인 호감도는 전쟁 후 비호감 70%로 역전됐고, 형제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4) 그렇게 탈나치화를 부르짖었건만, 반데라를 나치 전범에 학살자로 비판하던 우크라 국민마저 이제 그를 '반러 독립투사'로 옹호하게 되었다.
10월 5일 <발다이클럽> 연설에서 푸틴은 러우 전쟁이 영토 문제가 아닌 '새로운 국제질서의 원칙'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원칙이란 그가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국제사회의 민주화', 또는 20주년을 맞은 이번 <발다이클럽>의 대주제인 '공정한 다극성'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국제질서란 미국의 유일 패권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국가, 많은 문명이 공정하게 가치를 인정받는 다극화된 국제관계를 말하며, 러시아도 그 다극 중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받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이 아무리 근거 없지는 않을지라도, 미국식 가치의 패권이 아무리 오만하고 위선적일지라도, 전쟁으로 원칙을 세우려는 러시아를 누가 따르고 싶은 가치로, 모범으로, 존중하고 받아들이겠는가.
오히려 푸틴의 전쟁은 1,2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에 공유된 가장 중요한 원칙, 즉, 평화 군축에 대한 합의를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전쟁에 직면해 성찰은 중단되었고, 너도나도 군비 증가, 군비 경쟁에 나서고 있다.
독일은 그간의 금기를 깨고 전쟁국 무기 지원, GDP 2% 수준의 국방비 증액을 발표했다. 독일 지도부는 이를 '시대 전환'이라 명명했고, 하버마스는 이를 '2차대전 이래 독일 최대의 정체성 위기'로 탄식했다.
이미 아베 시절부터 전쟁할 수 있는 군대를 지닌 보통국가화, 이를 위한 평화헌법 개정을 원했던 일본은 전쟁 후 3대 안보문서 개정을 통해 선제타격이 가능한 방위체제로 발 빠르게 전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냉전 종식 후 35년간 유지돼온 핵 군축 기조도 뒤집혔다. 6월 13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는 러우 전쟁으로 인한 핵전쟁 긴장 고조로 핵보유국들의 핵전력 증강이 본격화되고 있으며, 핵 군축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푸틴은 이제라도 전쟁을 멈춰야 한다.
6. 전쟁할 때가 아니다, 지구가 펄펄 끓고 있다
러우 전쟁은 '2차대전 후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을 시도한 최초의 전쟁', '2차대전 후 최단기간 최다 난민 배출 전쟁' 등 다양한 타이틀을 얻었다. 다음도 추가된다. '기후 위기가 국제정치의 핵심의제가 된 후 발생한 최초의 전면전', 그 결과, '전쟁이 야기한 탄소배출량 실측이 가능했던 인류 최초의 전쟁'이 그것이다.
6월 1일 유럽기후재단(European Climate Foundation)의 후원 아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기후 피해(Climate damage caused by Russia's war in Ukraine)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전쟁 1년 기준, 그로 인한 이산화탄소 및 기타 온실가스 배출량을 측정해 전쟁이 기후 위기 및 환경파괴에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른쪽은 직접적인 전쟁 행위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이다. 전쟁 1년 간 러시아 군대의 연료 소비로 1410만 톤, 우크라 군대의 연료 소비로 470만 톤, 탄약 사용으로 200만 톤의 온실가스가 배출되었다.
왼쪽은 직간접적 화재 발생이나 인프라 파괴와 재건, 피난민 이동 시 연료 소모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모든 영향을 합산한 것으로, 1년간 전쟁으로 총 1억 2000만 톤의 온실가스가 발생했고, 이는 벨기에 국가 전체의 1년 배출량에 맞먹는다.
2023년 지구는 각종 기상이변과 재난에 시달렸다. 이탈리아에서는 한여름 폭설이, 남반구에서는 겨울 폭염이 지속되었고, 하와이, 캐나다, 유럽 각국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9월 초부터 단 12일 동안 홍콩, 리비아 등 10개국에서 대홍수가 일어났다.
이 모든 재난과 이변의 원인은 지구가 그간의 워밍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보일링(boiling)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지구 역사상 최근 8년이 가장 더웠고, 나사(NASA)에 따르면 올 7월이 1880년 이래 가장 더웠다. 온난화로 인한 재난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펄펄 끓는 지구를 상대하며 달래야 한다. 여기에 '분노의 화염'까지 보태야겠는가. 인간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지금 어떤 정의보다 절박한 것은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러시아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와 지구를 위해 즉각 전쟁 중단과 평화협상 외 다른 길은 없다. 한국은 신냉전의 전위부대가 아니라, 이 평화협상의 중개자로 나서야 한다. 그게 가치외교다.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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