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는 미안했어”[살며 생각하며]
비행기 연착에 속이 부글부글
관리자 사과 않아 화 더 치밀어
인간은 실수로 배우는 게 아냐
그것을 잘 수습하면서 나아져
사과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진정성 있는 마음이 가장 중요
제주도에서 공연하고 돌아오는 비행기가 연착된다. 밤 9시 15분 비행긴데, 10시 반으로 연착된다더니 결국 11시 10분에 출발한다. 집밥 먹으려고 공연 전에 김밥 한 줄 먹었는데, 식당들이 다 문을 닫는다. 난감하다. 게다가 김포공항이 아니라 인천공항으로 간단다.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하필이면 왜 내게 이런 일이? 배가 고프다. 마음이 몹시 상한다. 누군가를 붙잡고 마구 화를 내고 싶다. 하지만 얼쩡거리는 항공사 직원들은 모두가 젊은 친구들뿐이다.
시간은 또 왜 이리 안 가는 거야?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채 5분도 안 됐다. 욕설을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리다 주위를 돌아본다. 내가 탈 비행기의 승객들만 있다. 그런데 아무도 불평 않고 표정도 구겨지지 않았다. 그냥 차분히 대화를 하거나 휴대전화기를 보고 있다. 신기하다. 이쯤 되면 어르신 한 분 정도는 분노를 포효하셔야 하는데, 내가 그 어르신 순번인가? 언제 우리 국민이 이렇게 침착하고 온화한 사람들이 됐지? 나만 밴댕이 소갈딱지인가?
비행기 트랩을 올랐는데, 젊은 직원이 피곤한 표정으로 “고객 여러분, 연착되어 매우 죄송합니다”라는 메마른 대사를 되풀이한다. 하지만 용서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화가 난다.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승무원이 “안전띠 착용하세요” 하는 톤으로 또 사과를 한다. “연착되어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인천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가라앉던 열불이 다시 끓어오른다. 난 안전하게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배가 고프다고! 이런 식의 사과는 기분만 더 상하게 한다고!!
잠깐, 그럼 난 어떤 사과를 받고 싶은 거지?
우선은 내 불쾌함과 고통을 헤아려주고, 그 책임이 항공사에 있다며 이런 상황이 되게 한 데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말을 듣고 싶다. “고객님들께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불편을 끼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피곤하고 시장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발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관리자나 기장이 직접 정중하게, 최대한 미안한 마음을 보였더라면 이렇게 화나진 않았을 텐데. 물론, 사과는 어려운 일이다. 자칫 잘못 하면 오히려 더 큰 분노를 불러올 수도 있다. 하지만 책임질 사람이 정직한 자세와 상대방의 비난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태도로 잘못의 윤리적·법적 책임을 제가 지겠다고 했더라면 “에이, 재수 없었네” 하며 툴툴 털어낼 수 있었을 텐데.
다음으로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과 재발 방지 계획을 듣고 싶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승객이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그래서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현실적인 보상의 약속. 밤 12시 반의 공짜 버스론 부족했다. 그리고 그 버스에 대한 안내도 잘 해주지 않았다. 미안한 심정, 부끄러운 마음, 진심 어린 사과의 표현이 없었다. 더구나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배경에 대해 전혀 말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2시간 동안 영문도 모르고 기다려야 한다면 알고 싶지 않을까?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피해자들일지라도 성실하게 설명해 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끝으로, 다시 진심으로 용서를 간절히 부탁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과는 진정성이 중요하다. 나는 그런 사과를 듣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도리어 괘씸죄만 추가된다. 진솔한 사과는 갈등과 불신을 해소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도구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늘 잘못된 언행을 할 수도 있다. 한 인간의 본질은 잘못하는 데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을 어떻게 잘 수습하는지, 그 잘못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변하는지에서 드러난다. 잘나갈 때는 누구나 다 호인이다. 힘들 때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새벽 2시. 택시에서 내려 집 근처의 해장국집에 들어간다. 소주도 한 병 시킨다. 술이 한잔 속으로 들어가니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따뜻한 국물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긴 하루였다. 수고했다, 잘 참았다. 어른인 내가 참아 주고 용서해 줘야지….
집에 도착하니 고양이가 가장 먼저 반긴다. “야웅!” 그래, 너밖에 없다. 사랑한다, 우리 아기. 아내는 그제야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왜 이렇게 늦었냔다, 밥 차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갑고 고마워서 뽀뽀해 주려고 아내를 끌어당기는데 밀쳐낸다. 술 냄새에 노친네 냄새까지 나서 역겹단다. 얼른 씻고 자란다.
역겹다고? 마음이 몹시 상한다. 슬프다. 그래도, 참아야 하느니라. 그런데 요즘 내가 왜 이렇게 잘 삐치는 거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내 남성 호르몬. 눈물이 나려 한다.
샤워를 하며 생각한다. 내가 아내에게서 어떤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지?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나, 어쩌지?
침상에 들면서 먼저 말을 꺼낸다.
“여보, 아까 미안했어. 난 당신이 기다리는 줄 모르고…, 자고 있을까 봐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온 거야. 그리고 냄새 내서 미안해.”
그새 고양이가 우리 사이를 파고든다. 긁어 달란다. 난 아직 말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아내는 한마디를 던지면서 돌아눕는다.
“아이 시끄러워. 그만 말하고 빨리 자!”
뭐니 뭐니 해도, 사과는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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