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범벅[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2023. 10. 2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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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것은 서럽지만 호박은 그리 서럽지만은 않다.

꽃이 지고 난 뒤 막 살이 오른 애호박도 맛이 있지만 때를 놓쳐 따지 못했든 일부러 묵혔든 시간이 지나면 노란빛의 늙은 호박도 쓸모가 많다.

호박 하면 떠올리는 모습도 애호박보다는 늙은 호박이니 호박이 늙는 것은 정말 늙는 것이 아니라 호박의 본 모습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박의 흔적이 좀 남아 있는 것은 버무리와 범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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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것은 서럽지만 호박은 그리 서럽지만은 않다. 꽃이 지고 난 뒤 막 살이 오른 애호박도 맛이 있지만 때를 놓쳐 따지 못했든 일부러 묵혔든 시간이 지나면 노란빛의 늙은 호박도 쓸모가 많다. 호박 하면 떠올리는 모습도 애호박보다는 늙은 호박이니 호박이 늙는 것은 정말 늙는 것이 아니라 호박의 본 모습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0월이 되면 이 늙은 호박을 수확하게 되는데 그 용도가 꽤 다양하다.

늙은 호박의 속을 파내고 겉살을 수직으로 사과 깎듯 깎아 말리면 호박고지가 된다. 이 고지는 떡을 찔 때 넣으면 단맛과 함께 예쁜 노란빛을 보여준다. 고지는 그나마 호박의 형상이 남아 있지만 잘게 부수거나 갈아 요리하면 더 다양하게 변신하게 된다. 각각의 요리는 호박 조각의 크기와 농도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호박죽인데 호박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노란색으로만 그 흔적을 남긴다.

호박의 흔적이 좀 남아 있는 것은 버무리와 범벅이다. 버무리는 말 그대로 다른 재료와 호박을 버무려서 쪄낸 것이다. 주된 재료는 쌀가루인데 쑥과 버무려 쪄내면 쑥버무리가 되고 호박과 버무려 쪄내면 호박 버무리가 된다. 버무리는 떡과 비슷하니 물기가 별로 없는 덩어리 상태이다. 그런데 범벅은 호박과 곡물가루를 된풀처럼 쑤어내니 그 상태가 죽과 버무리의 중간이다.

범벅과 버무리는 조미료와 식품 첨가물이 범벅된 음식 속에서 순수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곡물가루의 담백한 맛에 늙은 호박의 단맛이 버무려져서 적당한 단맛을 내준다. 그런데 이 범벅이나 버무리마저 욕심을 내서 설탕 범벅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자극적인 맛으로 승부해야 하는 판매용 음식이 그러하다. 순수한 범벅을 먹으려면 직접 늙은 호박을 수확해 삶은 뒤 곡물가루와 섞어 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땀범벅이 될 테니 쉬이 용기가 나지는 않아 아쉽기만 하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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