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8. 섬 주민들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탈을 막아라

최동열 2023. 10. 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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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총도(天下總圖) 강원도. 조선후기 지도로 양양 동쪽 바다에 울릉도를 기리면서 독도를 그려 넣었다. 삼척에 진(鎭)이 있으며, 보(堡)로 안인포, 고성포, 울진포, 월성포 등이 있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다.(독도박물관 소장)

■‘공도정책(空島政策)’ 아닌 ‘쇄환(刷還)정책’

-왜구 침탈로부터 주민 보호 위한 조치

여진족에 이어 야만의 왜구가 횡행하면서 ‘약탈의 바다’로 변모한 동해는 고려에 이어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에도 한동안 안정되지 못했다. 고려 말보다 침입 규모나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대마도 등지를 근거로 한 왜구들이 여전히 동·서·남해를 가리지 않고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은 태종3년(1403년)에 울릉도 등 동해상 도서(島嶼) 경영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조처를 내린다. 태종실록에는 당시의 조처를 ‘강릉도(江陵道)의 무릉도(武陵島) 거민(居民)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는 감사의 주청에 따른 것이다(命出江陵道 武陵島居民 于陸地 從監司之啓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감사’는 강원감사(오늘날 도지사)를 말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로 최초로 우리 역사에 편입된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도 당연히 군현 체제, 즉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구역의 편제상 강원도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 대마도 수호(對馬島 守護) 종정무(宗貞茂)가 토산물을 바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 보내면서 무릉도(울릉도)에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옮겨가 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불허했다는 내용을 전하는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태종7년 3월 경오(庚午)조/국사편찬위원회)

‘울릉도의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게 했다’는 태종 때의 이 조처는 ‘섬을 비워뒀다’는 뜻에서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도정책은 조선 초기 사정을 고려할 때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또 역사서에 등장하는 용어도 아니기 때문에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어 이제는 사실상 용도 폐기 상태다. 터무니없는 독도 영유권 시비를 제기해 온 일본이 ‘섬의 주민의 육지로 이주시켰다’는 것을 ‘섬을 포기했다’는 것으로 곡해하고, 확대 해석해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펼치는 재료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도 명칭을 수정해야 하는 한가지 원인으로 지목됐다.

영남대 김호동 교수는 ‘독도·울릉도의 역사’라는 제하의 책(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독도연구총서1, 2007년)에서 “1883년 울릉도 개척령 공포 이전의 울릉도·독도 정책을 공도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큰 잘못”이라며 “주민의 안전 또는 외부 침략에 대비해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킨 정책을 의미하는 ‘쇄환(刷還)정책’이라는 용어가 바람직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즉, 조선 태종 때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내렸기는 하지만, 1614년 광해군 6년에 대마도주에게 울릉도에 왜인(倭人)들의 왕래 금지를 준수하라는 서계(書契)를 보내고, 숙종 때에는 저 유명한 동래 사람 안용복이 울릉도·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는 일본 어부들을 내쫓기 위해 직접 일본을 방문해 실력자들에게 따지고 우리땅(조선땅)임을 인정하는 막부의 문서까지 받아왔으며, 조선시대에 삼척첨사(영장) 등을 중심으로 관리들이 주기적으로 울릉도·독도를 수토(搜討)했던 역사 등을 돌이켜 볼 때 결코 공도(空島)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마도주의 울릉도 이주 요청도 불허

-울릉도·독도와 동해안은 순망치한(脣亡齒寒)관계
 

▲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 입구에 서 있는 삼척포진 영장 비석군. 삼척영장들은 조선시대 울릉도·독도 수토(搜討) 임무를 맡았던 주역들이다.

‘공도’ 명칭이 잘못됐다는 것은 대마도주가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무릉도(武陵島·울릉도)에 옮겨 와 살기를 요청한 것을 조선 정부가 불허한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실록에는 대마도 수호(對馬島 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면서 무릉도에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 싶다는 요청을 했으나 이를 불허하는 내용이 나온다. 태종이 대마도주의 울릉도 이주 요청을 불허한 것은 울릉도에 살던 백성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지 불과 4년 뒤인 1407년의 일이다. 만약 주민들을 이주케 하면서 섬을 포기하는 경우라면, 그 경계를 따지지 않고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주의 이주 요청은 조선 조정에 의해 불허됐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대목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그럼, 조선 조정은 왜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려고 했을까?

답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고려 말부터 동해 전역에서 날뛰던 왜구들의 준동으로부터 주민들의 피해를 막아보자는 뜻이 담겨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고려 말에 더욱 극성을 부린 왜구는 서·남해안에 이어 동해안까지 북상, 강릉과 삼척, 울진 등 동해안 전역에서 노략질을 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울릉도에 많은 사람이 거주하면 노략질 대상이 되는 것은 자명하고, 울릉도를 약탈한 왜구들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면, 강릉, 삼척 등 동해안이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왜구들은 실제로 울릉도를 노려, 고려사에는 우왕 5년(1379년)에 ‘왜인들이 무릉도에 들어와 반월(半月·보름간)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는 내용이 보이고, 이후 조선 태종 17년(1417년) 실록에는 ‘왜구들이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를 도둑질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태종이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도록 하고, 대마도주의 이주 요청을 불허하는 등의 일련의 조처를 한 것은 울릉도가 왜구들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기 때문이라는 1차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군역(軍役), 즉 병역의 의무를 피하려는 등의 목적에서 울릉도를 도피처로 삼는 백성들이 생기고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자는 차원이다.

예나 지금이나 병역의 의무는 고되기 짝이 없다. 따라서 성인이 되면 무거운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동해 바다 한가운데, 육지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울릉도는 그런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매우 좋은 도피처였을 것이다. 젊은 장정들이 힘든 군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도로 달아난다면 동해안의 군역 대상자는 줄게 마련이고, 그것은 왜구 등의 침탈을 막는데도 비상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왜구를 막는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해안 군사력 보충의 차원에서도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

왜구들의 침탈로부터 울릉도를 보호하고,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을 다시 쇄환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울릉도에 사는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려 했다는 것은 당시 안무사(按撫使)로 울릉도에 파견되는 삼척사람 김인우(金麟雨)가 왕에게 울릉도 사정을 설명한 데서도 드러난다. 태종실록에 김인우의 말이 기록돼 있는데, 그는 “무릉도가 멀리 바다 한가운데에 있어 사람들이 쉽게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을 피하는 자가 간혹 도망해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왕래하고,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끝내는 왜적이 들어와 도적질 하고, 이로 인해 강원도까지 침노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입술이 상하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고사를 김인우의 걱정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동해안과 울릉도의 관계가 그와 같기 때문이다.

*참고= 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 인터뷰 직함은 논문 발표와 책 발간, 인터뷰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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