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그림에 담은 이순신의 ‘결정적 장면’

김석 2023. 10. 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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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추 이남호 〈충무공평생도십곡병〉, 종이에 수묵담채, 가병풍, 159cm×58cm×10폭 (사진제공: 칸옥션)


여기, 화려하게 채색된 병풍 그림이 있습니다. 세로 159cm, 가로 58cm로 제법 큰 그림이 모두 열 폭. 아직 정식 병풍으로 꾸미지는 않았지만, 펼쳐 놓으면 그 규모에 우선 압도됩니다. 고미술 전문 경매회사 칸옥션이 오는 26일(목) 개최하는 미술품 경매에 나온 작품인데요. 특별히 이 병풍 그림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림의 내용입니다.

병풍을 감상하는 순서에 따라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화려한 채색을 가미한 전통 수묵화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배경에 계절에 맞는 꽃나무도 곱게 그려 넣었고, 말이나 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장수와 병사들의 모습도 보이고요. 어떤 중요한 인물에 얽힌 역사적 장면을 그렸구나, 짐작해볼 수 있겠죠.

〈충무공평생도십곡병〉 제1폭 세부


이 장면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자명합니다. 화면 가운데 나무 막대기를 높이 치켜든 소년이죠. 옆의 부관으로 보이는 소년이 영(令)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대장이라는 걸 보여주죠. 그렇다면 닭들이 마음껏 활보하는 동산에서 청기, 홍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소년들이 하는 건 뭘까? 네, 정답은 병정놀이입니다.

이 병풍 그림에 붙은 제목은 <충무공평생도십곡병>.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생에서 중요한 열 가지 장면을 뽑아 그린 겁니다. 소년 이순신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 할 정도로 남다른 비범함을 보여줬다는 기록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요.

〈충무공평생도십곡병〉 제2폭 세부


이순신 장군에 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장면 역시 알아보기 쉽습니다. 과거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진 일화죠. 기록에는 부러진 다리에 나무를 대고 묶은 뒤 다시 말에 올라 시험을 끝까지 마쳤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 스물여덟이었죠.

이순신 장군 위인전을 비롯한 어린이용 책을 보면, 대개는 부러진 다리를 묶는 장면을 그린 삽화를 실은 경우가 많은데요. 화가는 청년 이순신이 다시 일어나 말고삐를 잡는 장면을 화면 가운데 크게 부각해서 그렸습니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바닥에 앉아 부러진 다리를 동여매는 장면보다 다시 일어서서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모습이 더 이순신답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32살에 드디어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이 국토 최북단 국경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세 번째 그림에 이어 네 번째부터는 본격적으로 임진왜란이 등장합니다.

〈충무공평생도십곡병〉 제4, 5폭 세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림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묘사한 오른쪽 그림을 보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의 선박을 크게 그렸습니다. 가운데 깃발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라는 한자가 보이죠. 화면을 등지고 선 왜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화면 맨 위에 부산 동래성이 보입니다. 전체 10폭 가운데 네 번째 그림에는 이순신도, 조선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바다를 가리키며 작전을 구상하는 이순신 장군의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배치한 화가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을 잘 보세요. 정확하게 오른쪽 그림의 왜군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물길을 가리키는 손이 다음 그림의 왜군을 향하게 한 건 화가의 계산이었습니다. 반대로 오른쪽 그림에서 왜군들이 겨누는 활은 이순신 장군 일행을 향하고 있죠.

〈충무공평생도십곡병〉 제6폭 세부


연전연승의 시작을 알린 당포해전이 여섯 번째 그림을 장식합니다. 거북선이 적진을 휩쓸고 다니며 왜군 선박을 침몰시키는 장면을 박진감 있게 묘사했죠. 거북선에서 발사한 총통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불꽃이라든지 배 주변으로 일어나는 물거품, 파도와 연기 등을 묘사한 화가의 솜씨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충무공평생도십곡병〉 제7~10폭 부분


제7폭은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압송되는 모습, 제8폭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장면, 제9폭은 무너진 조선 수군을 다시 추슬러 왜군과 결전을 벌이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제10폭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그림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화가가 각각의 그림 위쪽에 내용을 간략하게 적었습니다.

경매 전시장에서 병풍을 처음 펼쳐본 순간 적잖이 놀랐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이렇게 정성을 다해 그린 화가가 있었다니.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추려 하이라이트로 구성한 것도 그렇고 그림의 내용, 구성, 기법까지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의 존재를 어째서 여태 몰랐을까.

사진출처: KBS


이 그림을 남긴 화가는 금추 이남호(李南浩, 1908~2001). 주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중앙 화단과 거리를 둔 채 활동한 까닭에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화단에서는 꽤 비중 있는 화가로 이름을 알렸죠. 당시 화단의 큰 흐름을 좇지도 않았고, 화가로 성공하겠다는 욕심도 없었기에 이남호 화백은 그 어떤 사조나 유행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남호 화백의 장기는 역사인물화였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업적을 열두 점으로 그린 <목화씨 전래도>, 성춘향의 일대기를 묘사한 열 폭짜리 병풍 <춘향전일편>, 그리고 이번에 경매에 나온 <충무공평생도> 등이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지 1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제작한 <전기시등도>가 한국전력에 소장돼 있기도 하죠.

사진 출처: KBS


혹 인터뷰 자료가 있나 싶어 KBS 자료를 찾아봤더니, 2000년 2월 7일 KBS 1TV에서 무려 47분 분량으로 방송된 <TV 명인전 - 야인의 꿈, 한국화가 이남호> 편이 있더군요. 당시 아흔셋이었던 화가는 방송이 나간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니, 화가의 생전 모습과 육성을 담은 더없이 귀한 자료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이토록 진지하고 아름답게 그린 근현대 화가의 작품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화가의 대표작으로 꼽는 <충무공평생도십곡병>은 지금까지 온전한 병풍으로 꾸며진 적이 없는지, 임시 병풍 형태로 이번 경매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그 의미와 가치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아온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는 분들은 물론 충무공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 기관, 단체 등에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경매 출품작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작품이 있습니다. 가톨릭 순교화로 유명한 탁희성(1915~1992) 화백이 그리고, 작곡가이자 아동문학가 윤극영(1903~1988)이 글을 쓴 <거북선>이란 작품입니다. 3.1운동 60주년이던 1979년은 세계 어린이 해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 하면 거북선을 빼놓을 수 없으니, 공교롭게도 이 근사한 합작도가 경매에 나온 것도 인연이 아닌가 합니다.

■경매 및 전시 정보
- 제목: 칸옥션 제29회 미술품 경매
- 경매: 2023년 10월 26일(목) 오후 4시
- 전시: 2023년 10월 25일(수)까지 무료 관람
- 장소: 서울 인사동 건국빌딩 건국관 1층 칸옥션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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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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