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채집만으로 먹고산 1년… ‘자연의 풍미’에 눈떴다[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3. 10. 20. 09: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야생의 식탁
모 와일드 지음│신소희 옮김│부키
스코틀랜드 老 약초 연구가
“마트 대신 숲에 가겠다” 선언
사계절 야생식만 먹고 버텨
해초·풀잎 따서 식재료로 써
이웃이 잡은 사슴고기 먹기도
다람쥐 요리, 맛집보다 훌륭
겨울-봄 사이 ‘보릿고개’위기
언땅 녹자 버섯·송어 등 성찬
체중 30㎏ 줄고 기운 솟구쳐
‘야생의 식탁’의 저자는 쉰 살에 대학에 들어가 약초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세 아이를 다 키우고 친구들과 스코틀랜드 중부 지역에 살며 허브와 버섯을 연구한다. 사진은 8월 어느 날 저자가 직접 채취한 버섯과 이파리들. 모 와일드 제공

스코틀랜드 할머니 버전의 ‘자연인’ 다큐멘터리라고 할까.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하다. 저자의 이 ‘특별한 식탁’은 보다 본능적이고, 거칠며, 그래서 생생하고, 풍요로움조차 뛰어넘는다.

책은 “일 년 동안 야생식만 먹겠다” “마트 대신 숲에 가겠다”고 선언한 저자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나는 식물만 채취해 스스로를 먹여 살린, 그 ‘숲살이’를 기록했다. 여기엔 약초 연구가라는 이력이 영향을 끼쳤다. 고대인처럼 야생식만 먹는 삶이 가능할까라는 순수한 호기심. 그러나 근원적 이유엔 기후 위기와 자연 파괴에 대한 염려가 있다. 그는 언젠가 정말로 지구에 식량 위기가 왔을 때, 인류가 수렵·채집만으로 생존할 수 있을지, 스스로 실험대상이 돼 증명한다. 죽은 나무둥치 아래에서 버섯을 찾고, 바다에서 해초를 따며, 추운 겨울에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얼지 않은 풀잎을 따야 하는 ‘야생’에서 말이다.

저자의 ‘실험’은 스코틀랜드 중부 지역에서 일 년, 사계절 동안 진행됐다. 가장 궁핍한 겨울에 시작해 풍요로운 가을까지. 첫날이 11월 27일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코로나19라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자연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쇼핑에 탐닉하는 모습에 좌절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단식투쟁에 가까운 최후의 수단이 필요하다”며 ‘모험’을 단행한다. 약초 전문가이니 야생의 식탁 차림이 수월할 거라 생각되지만 예상보다 큰 각오가 필요했다. 이는 오랜 채식 생활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야생에선 당근, 애호박, 브로콜리 등이 자라지 않는다. 무엇이든 먹어야 했다. 저자는 “이웃이 잡아다 준 사슴고기가 아니었다면 기나긴 겨울을 어떻게 버텼을까”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야만’스러운 상황에도 처한다. “운명이 나를 단단하게 시험하려는 모양”이라고 시작하는 1월의 한 일기에는 회색다람쥐 세 마리를 어떻게 조리해 먹었는지 쓴다. 털가죽을 벗겨내니 다람쥐 몸의 풍부한 지방이 드러났고, 이는 빵과 사슴고기를 굽는 데 쓰인다. 나머지 고기는 미트볼처럼 빚어 튀겨 먹었다고. 저자는 “내가 먹고 싶은 건 싱싱한 식물인데, 그들은 모두 아직 눈 속에 파묻혀 있다”면서도 이날의 요리를 이렇게 상찬한다. “야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맛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도 이보다 더 훌륭한 요리는 맛본 적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책은 겨울과 봄 사이 ‘야라흐’에 대해 무척 길게 서술한다. 사실 저자는 다섯 계절을 보냈다. 이는 책을 흔한 ‘사계절’류에 묶이지 않게 하는 독특한 지점이다. 야라흐는 켈트어로 ‘배고픈 시기’라는 뜻인데, 아주 이른 봄, 일종의 ‘보릿고개’다. 비축한 식량이 바닥을 보이지만, 아직 과일과 채소는 싹트지 않는 때. 저자는 식욕과 기력을 잃고 우울증까지 앓으며 위기를 맞지만, 얼었던 땅이 녹자 갓 딴 신선한 버섯을 요리해 먹으며 유쾌하고 모험심 강한 할머니로 돌아온다. 그리고 ‘완연한 봄’. 민들레 뿌리를 깔고 싱싱한 송어를 올려 굽고, 20여 종의 잎과 꽃을 곁들여 먹었다. 들판과 강의 풍미가 살아있다. 저자의 몸과 마음도 살아난다.

책의 원제는 ‘The wilderness cure’, 즉 ‘야생 치유’다. 이 프로젝트를 마쳤을 때 저자는 달라진 식단으로 인해 약 30㎏이 줄어 25년 전 옷 사이즈를 입게 됐고, 실험에 동참한 당뇨병이 있던 친구는 혈당수치가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몸만 치유된 게 아니다. 제철 식재료를 발견하고, 음식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며, 낯선 이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고, 이웃과 야생동물 고기를 나누는 등 자연과, 자연만큼 사람에 의지하는 삶은 마음도 치유했다. 특히 저자는 햇과일이 나올 때까지 낚시와 유제품에 의존하게 되는 여름에 친구네 농장에 머물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일종의 명상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우엉 뿌리를 캐서 껍질을 벗기고, 한 땀 한 땀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우유를 짜 치즈를 만든다. “물건을 만들고 수선하는 데 시간을 들이다 보면 현재의 삶에서 내가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이런 감사의 마음은 가장 소박한 삶에도 풍요로움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윽고, 마침내 가을. 먹을거리가 넘쳐 기쁘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느라 바빠지는 이때에, 저자는 가을 햇볕 아래 누렇게 변하며 시들어 가는 석잠풀의 속삭임을 듣는다. “모든 것에 반응하지는 마. 너무 분주하게 살지도 마. 지금 너에게 가장 유익한 일에 집중해.”

실험은 끝을 향해 간다. 우리의 삶, 그 중심을 차지하는 먹을거리가 얼마나 자연과 멀어져 있었던가. 자연이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마음이 넉넉하다. 결과는 이미 선명한데, 저자는 이 실험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먹을거리를 채취하러 밖에 나가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실 때마다 기운이 솟구치고 나 자신을 되찾는 느낌이다.” 식료품을 사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숲과 바다를 쏘다니며 자연이 내주는 것만으로 일 년 동안 식탁을 차려 본 저자는, 직접 몸을 쓰지 않으면 단 한 끼도 해결할 수 없는 고단한 생활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다. 이는 저자가 홀로 세 아이를 키우고, 쉰 살에 대학에 가 약초학 석사를 받고, 지금도 식물과 허브, 버섯에 매료돼 사는 ‘특별한 할머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책은 우리에게는 ‘채취 본능’이 있고, 깊은 숲속에 들어가면 누구나 그것이 깨어나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것, 즉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를 눈앞의 자연에 몰두하는 이 ‘간접 체험’은 적지 않은 이들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무한 욕망의 소비지옥인 ‘밥상’을 밀어내고 ‘야생의 자아’를 찾아 떠나고 싶을 것이다. 채취·수렵인의 후예인 우리에게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동시에 자연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428쪽, 1만98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