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놀라움을 깨우는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우리는 시인이 필요하다. 무딘 감각으로 미처 집중하지 못하던 갖가지 사물들이, 시인의 시선으로 깨어난다. 식물들과 동물들, 세계가 깨어난다. AI 시대가 도래했지만 20세기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그렇다. 연습이나 훈련이랄 것 없이 모든 순간이 다 처음이다. 그러니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이란 학교에 낙제는 없다. 그러니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태어나 죽음이란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단 한 번의 하루, 단 한 번의 밤, 단 한 번의 입맞춤, 단 한 번의 눈빛.’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이다. 시는 다시 이어진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너’라는 표현은 시를 읽는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시는 내게 힘겨운 나날에 왜 불안으로 두려워하는지 묻는다. 답을 내놓을 것 없이 시가 응답한다. 우리는 존재하므로 사라질 것이고, 사라지므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단 한 번에 사라질 것이라고 해서 하찮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찮은데 하찮지 않다. 어느 날 사라질 것이므로 지금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삶의 의미와 무의미가 풍성하게 피어오른다. 세상은 덧없는데 덧없지 않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으니 매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만큼 귀하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 서로 다를지라도…."
시 '두 번은 없다’는 이렇게 끝난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할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높은 설득력이라니. 각자가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면 우리가 함께하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이건 우리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은가의 문제다.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아무리 서로 다른 유일한 존재더라도 두 개의 물방울 사이의 일치점 정도를 찾는 건 쉬워 보인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는 우애가 있다면 말이다.
‘두 번은 없다’는 심보르스카의 대표작이자 폴란드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사랑받는 시다. 번역으로 인해 운율을 느끼지 못하지만 의미만으로도 울림이 결코 작지 않다.
20세기를 산 시인
최성은은 우리말 시집 '끝과 시작’에서 심보르스카의 생애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심보르스카는 1923년 폴란드 중서부의 소도시 브닌에서 태어났다. 크라쿠프에 있는 야기엘론스키대학교에서 사회학과 폴란드어문학을 공부했다. 야기엘론스키대는 오래전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했던 고풍스러운 폴란드 명문 대학이다. 대학을 그만둔 후 심보르스카는 정부 기관지 '크라쿠프 공회당’, 잡지 '문학생활’ 등의 편집부에서 일했다. 1968년부터는 잡지 고정 필자로 30여 년간 '심보르스카의 권장 도서’란 제목하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했다.
심보르스카의 젊은 시절, 폴란드는 공산주의 체제였다.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념 친화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조되던 때였다. 심보르스카가 1952년에 낸 첫 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1954년에 낸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충실히 구현했다. 1954년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으로부터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여기까지의 이력을 보면 시 '두 번은 없다’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분명 시인의 시선은 사회나 체제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 심보르스카는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했고, 1957년 '두 번은 없다’가 실린 시집 '예티를 향한 부름’을 펴냈다. 그래서 '예티를 향한 부름’이 실질적으로는 데뷔 시집처럼 여겨진다.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1967년 시집 '애물단지’에 실린 '사진첩’의 처음과 끝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문의 반목에 휩쓸려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시인은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대개의 삶이 평범한 일상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주목해보자는 건 아닐까. 삶이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거나 사랑에 목숨 거는 거대한 이야기는 이런 평범한 삶을 어딘가로 몰고 가며, 결국 그 평범함에 담긴 소중한 의미를 잃게 한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한 심보르스카에게 그 일상이 놓인 현실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현재는 과거라는 역사가 누적돼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이 점에서 일상과 역사는 대립한다. 역사와 무관한 일상은 지속 불가능하고 일상과 무관한 역사는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우리의 20세기는 이전의 다른 세기들보다 / 훨씬 더 발전할 예정이었다. / 그러나 그 사실을 입증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바야흐로 신은 인간이 선하면서, 동시에 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수긍할 예정이었다. / 그러나 선함과 강함은 여전히 공존하지 못한다. / 선한 인간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인간은 선하지 않다."
1986년 펴낸 시집 '다리 위의 사람들’에 실린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일부다. 20세기는 발전할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인간은 강하면서 선하려고 했으나 그러하지 못했다. 시인이 드러낸 실망처럼, 인류에게 20세기는 쉽지 않았다. 비극과 재앙이 도처에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있었고, 이 시가 쓰인 1980년대 중반까지 세계는 냉전의 한복판에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 바로 그 질문이었다. (…)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마지막 구절이다. 심보르스카 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심보르스카는 관념 또는 이념에 지나치게 포획된 시인이 아니다. 그가 중시한 것은 관념과 이념 앞에 존재하는 일상과 삶 그 자체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우리 인간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20세기 후반 폴란드에서의 삶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삶과 달랐다. 정치적·경제적 삶이 다르다고 문화적·실존적 삶마저 다른 것은 아니다. 심보르스카에게는 보편적인 실존적 삶도, 구체적인 역사의 흐름도 모두 중요했다. "인간 실존 문제를 역사적·생물학적 특성과 연계하여 명쾌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것이 스웨덴 한림원이 심보르스카에게 노벨상을 수여한 이유였다.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기 마련. / 사령관의 망원경에 포착된 동그란 풍경처럼 / 지극히 현실적인 자신만의 지평선을 가지고 있다."
심보르스카를 만나는 이유
생각해보면 삶이란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의 의미를 계속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심보르스카는 역사와 현실이 갖는 힘과 무게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역사와 현실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아니다. 역사적·현실적 삶 안에 존재하며 무수한 자유와 상상을 안겨주는 자기만의 사건, 일, 의미를 반복해 발견해가는 게 삶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시인이 바로 심보르스카다.
"하지만 우리가 준거의 틀로 삼을 만한 지극히 '당연한’ 세상은 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놀라움은 스스로 현존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것과의 비교를 통해 생성될 수는 없습니다. (…)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바위도,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그 어떤 구름도, 그 어떤 날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그 어떤 밤도. 아니,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도."
심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의 일부다. 자신의 시에 대한 가장 간결한 요약이다. 시인의 사명은 지상에 놀라움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도 당연히 존재하는 세계와의 비교를 통한 게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놀라움을 포착하고, 표현하고 드러내야 한다.
인간과 사물이 모두 속한 세계는 평범하거나 일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놀라움을 잃는다. 놀라움을 잃은 세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세계가 놀라움을 잃고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는지. 시인의 눈에 띄어 놀라움을 회복할 때까지 바위는 그저 흙먼지를 둘러쓴 채 길가에 서 있고, 구름은 하늘에 흘러 여기저기 흩어질 뿐이다. 낮과, 이어지는 밤은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필요하다. 무딘 감각으로 미처 집중하지 못하던 갖가지 사물들이, 시인의 시선으로 깨어난다. 식물들과 동물들, 세계가 깨어난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깨어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하찮은 것은 없다. 하찮게 본다면 그건 알아보는 눈이 없어서다. 모든 존재가 소중하니 모든 삶이 소중하다. 시인의 눈으로 보면 세상엔 소중하지 않은 삶이 없다. 그러니까 나의 삶 역시 소중하다. 이렇게 시인의 눈과 지혜를 빌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힘을 얻는다.
심보르스카는 2012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12권의 시집을 냈고, 유고 시집으로 '충분하다’가 출간됐다. 1967년에서 2002년까지 30여 년 동안 폴란드의 신문과 잡지에 연재되었던 서평들을 골라 만든 서평집도 번역되어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데도 우리나라에서 그녀의 시들은 계속해서 읽히고 있다.
가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내가 이 21세기에도 시를 읽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과 유사한 사이보그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대로 인류는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만의 느낌과 감성 그리고 삶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습 없이, 훈련 없이 진행되는, 두 번은 없는 단 한 번만의’ 이 삶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다. 가끔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는, 그녀의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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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뉴시스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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