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받는 약자들의 서사를 그리다…40년 리얼리스트의 화폭

노형석 2023. 10. 2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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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희 작가의 개인전 ‘거기 계셨군요’
2층 전시장에 나온 2018년작 유화 ‘무기를 들고’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 노원희 작가. 수북하게 쌓인 식기, 주방용구들의 더미와 가정 폭력의 도상들을 배경으로 프라이팬을 피켓처럼 들고 서있는 일군의 여성들을 그린 작품이다. 여성을 짓누르는 가사노동의 중압감과 사적공간에서 자행되는 남성의 폭력적 억압 양상을 강렬한 상징성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달라는 70년대 미국 여성운동 캠페인을 떠올리며 그렸다고 털어놓았다. 노형석 기자

지난 한해 한국에서 살기위해 노동하다가 몸이 부서져 숨지거나 다친 사람이 9만명을 넘는다. 이런 현실을 그림 한폭에 담으려면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죽거나 다친 모습을 일일이 그리는건 미술의 품격이 아닐 터다.

지금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기획 초대전 ‘거기 계셨군요’를 펼치고 있는 화가 노원희(75)씨는 올초에 전시장 들머리 신작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다 기묘한 곡예 체조의 풍경을 그리게 된다. 높이 4m를 넘는 회색조 화폭에 체조선수로 등장하는 이들은 발목이 날아가고 손이 잘려 의족과 의수를 한 검은빛 산재 노동자 4명. 이들은 서로의 손과 발, 의족과 의수를 받치고 기대고 붙잡은 채 물구나무를 서서 사람 탑을 쌓는다. 아크릴 물감으로 붓질한 작품 제목도 ‘탑’이었다. 해병대 인터넷 카페에서 우연히 검색한 월남전 당시 참전용사들 기념사진이 실마리였다. 작가는 참전용사들이 건장한 몸을 과시하려고 만든 사람 탑 사진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의수와 의족을 한 산재 피해자들의 온전하지 못한 몸을 대신 그려넣었다.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가는 한국 산업자본주의의 모순된 구조를 해병대원들의 기념 상징물을 차용해 형상화한 것이다.

1층 전시장에 안쪽 벽에 내걸린 작가의 올해 신작 ‘사복으로 갈아입히고’를 관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가로 길이만 4m를 넘는 대작인 이 작품은 최근 수년간 산재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의 형상이 검은 그림자 유령 같이 꾸물거리는 군상화다. 노란 바탕의 대형 화면에 피해자들의 증언을 적은 얇은 천을 일일이 붙이면서 콜라주하는 기법으로 말하는 회화의 얼개를 꾸려냈다. 노형석 기자

바깥에 있는 누군가를 불러준다는 의미로 지어진 ‘거기 계셨군요’란 전시 제목에 걸맞게 ‘탑’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증폭되는 작가의 참여적 발언을 들려주는 확성기 구실을 한다. 미술관 1층 들머리 측면에서 설치작품처럼 관객 시선을 맞는 이 작품의 처연한 풍경이야말로 감상의 요체다. 이 대작이 걸린 임시가벽 뒷부분에는 37년간 복직투쟁을 벌이며 이런 모순구조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해온 노동자 김진숙씨가 젊은 용접공시절 자기 모습을 담은 액자를 들고 서 있는 초상 그림을 붙여 의미심장한 갖춤을 이루었다. 두 작품이 앞뒤로 걸린 가벽 배후의 안쪽 공간에는 2000년대 이후 노동현장에서 산업재해로 희생당하고 상처를 입은 피해자와 유족들의 몰골과 자취를 담은 그림들이 떠다니는 것처럼 내걸린 광경도 볼 수 있다.

공공미술관에서 처음 내보이는 노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지난 40여년간 한국 사회의 변모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화폭에 그 단면과 이면을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온 그의 관심사를 근작들 위주로 보여주는 자리다. 1980년대 회화부터 신작 회화, 대형 천 그림, 참여형 공동작업, 신문 연재소설 삽화, 아카이브 등 40여년간의 작업 내력을 조망할 수 있는 130여점의 작품자료들이 나왔다. 앞머리는 작가의 근본적인 관심사인 약자들의 고통스런 몸짓, 이를테면 맞고 갇히고 다치고 굴종하고 피하는 등의 동작 실루엣을 담은 30점의 ‘몸’ 소품 연작으로부터 풀려나온다. 뒤이어 전두환 5공 독재시절의 짓눌린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80년대의 거리와 군상 연작들과 변혁운동의 시대가 퇴조하면서 맞이한 90년대초의 전환기의 사라지는 풍경, 신자유주의 대두로 자기계발의 강박증을 불어넣었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세태 분위기, 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2010년대 이후 산업재해 현장까지 지난 40여년 간 약자들을 희생시키며 펼쳐진 한국 사회의 심리적 풍경을 배치해놓았다.

앞 부분에 1980년대 소외된 서민들의 일상과 내면의 심리적 풍경을 담은 명작들인 ‘나무’ ‘한길’ ‘거리에서’ 등이 나왔지만, 회고전은 아니다. 실제 주축을 이루는 건 80년대 그림들 다음에 30여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맞닥뜨리게 되는, 2010년대 이후 노동현장의 산재노동자와 이주민, 청년의 음울한 삶의 풍경을 다룬 크고 작은 그림들이다. 출품작 시차가 크긴 하지만, 작가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응시해온 핍박받고 불안한 약자들의 서사들이란 점에서 맥락이 꿰어진다. 수십여년간 계속 그림들 속에 쌓여온 약자의 이야기들이 눈을 무겁게 짓누르는 특유의 회색빛, 청회색빛 화폭을 배경으로 풀려나오면서 관객은 어찌할 수 없이 화면으로 끌려들어 가게 된다. 지난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콘베이어벨트에 끼어숨진 청년 김용균이 죽음의 기운 소용돌이치는 작업현장으로 들어가는 뒤태를 형상화한 ‘화력발전소’(2022)의 도상이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하다.

대표작인 ‘탑’과 더불어 주목되는 작품이 1층 안쪽 벽에 내걸린 아크릴화 신작 ‘사복으로 갈아입히고’다. 가로 길이만 4m를 넘는 이 작품은 최근 수년간 산재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의 형상이 검은 유령의 그림자처럼 꾸물거리는 군상화다. 화면의 바탕색이 작가의 기존작에서 보기 드문 노랑 색조인데다, 숨지거나 다친 피해자와 유족들의 증언을 적은 얇은 천을 군상들 사이에 일일이 붙여 콜라주하는 기법까지 덧붙이면서 ‘말하는 회화’의 얼개를 만들어냈다. 사회 이면에 잘 보이지 않는 기층 약자들의 모습과 현장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이들의 목소리까지 뚜렷하게 전달하겠다는 발화의 의지가 드러난다. 앞으로 작가의 작업에서 이렇게 글자로 적은 증언 콜라주들이 어떻게 변모되어 나타날지 기대를 모으게 하는 대목이다.

1층 전시장 들머리 모습. 눈앞 정면에 가벽을 치고 일종의 설치회화 형식을 띤 높이 4m 넘는 대작 ‘탑’을 내걸었다. 작가가 해병대 인터넷 카페에서 월남전 당시 찍은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모티브 삼아 그린 이 작품은 참전용사들이 자신들의 건장한 몸을 과시하려고 구성한 인간 탑의 구도에 의수와 의족을 한 산재 피해자들의 온전하지 못한 몸을 대입시킨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사지로 몰아가는 한국 산업자본주의의 모순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2층은 가정을 비롯한 사적인 일상에 스며든 남성성의 폭력과 가사노동의 압박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서사를 다룬다. 2019년 학고재 전시에서도 선보였던 유화 ‘무기를 들고’(2018)가 2층 전시의 성격을 대표한다. 수북하게 쌓인 식기, 주방용구들의 더미와 가정 폭력의 도상들을 배경으로 프라이팬을 무기처럼 들고 항의하며 서있는 일군의 여성들을 그렸다. 부엌에서 무기를 발견한 여성의 자각과 힘이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거대한 촉수들에 휘감겨 탈북자 여성이 널브러진 배가 옴짝달싹 못하는 광경을 그린 ‘생애2’란 작품도 시각적 충격을 던지는 수작이다. 2007년 1~6월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의 삽화들을 보여주는 2층 전시장 말미에선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와 결혼한 주인공 바리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지구적인 문제와 부딪히는 여정을 담은 소품 도상들을 통해 약자를 향한 작가의 교감이 거시적인 조형의식으로 확장되는 양상도 살필 수 있다.

노 작가는 1980년 국내 처음 현실비판적 리얼리즘을 앞세운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한 이래로 40년 넘게 ‘지금 현실’의 단면을 기록하는 리얼리스트의 본령을 지키며 작업해왔다. 부박한 사조나 시류에 휘몰리지 않고 여성의 눈으로 흐르는 시대와 현실의 모순을 연극적 구성이나 초현실적인 상징물 등으로 표현해온 그는 약자가 직면한 보이지 않은 현실을 보이도록 재현하는데 더욱 열정을 쏟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제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건 인간과 삶입니다. 늘 뇌리에 있는 시인 파울 첼란의 싯구에 ‘누구의 뺨을 부비랴 몽당손으로 붙잡은 너의 뺨이 아니라면’이란 구절이 있어요. 제 삶을 붙들고 있는 손은 몽당손이 되지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손가락 하나 혹은 여러개가 없는 몽당손으로 지탱되고 있을지를 떠올립니다. 다들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고통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거죠. 그런 고통의 현장을 앞으로 더욱 깊이 바라보고 드러내고자 합니다.”

11월19일까지.

2022년작 ‘화력발전소’. 지난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콘베이어벨트에 끼어숨진 청년 김용균이 죽음의 기운 소용돌이치는 작업현장으로 들어가는 뒤태를 형상화했다. 노형석 기자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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