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에서 만난 과학자들

한겨레 2023. 10.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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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과학의 언저리][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지난 7일 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서울세계불꽃축제 2023’의 화려한 불꽃이 가을밤을 수놓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10월7일 토요일, 서울 신도림역 근처 고층건물 옥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상 200m 가까운 곳에서 보는 서울 풍경은 대단했다. 신도림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건물의 높이 때문인지, 복잡한 대도시의 모습이 남산 서울타워나 롯데타워에서 볼 때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민경은 교수 연구팀은 지난 3월 이 건물 옥상 한쪽에 설치해 둔 이산화탄소 측정 장비를 확인하러 왔다. 대기화학자인 민 교수는 도시 공기 속 오염물질이 어떻게 생성되고 이동하는지 측정하고 분석하는 연구를 수년째 하고 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과 나는 촬영팀과 함께 이날의 측정 활동을 참관하면서 영상으로 기록하러 갔다.

우리가 굳이 토요일에 모인 이유는 이날 저녁 여의도 불꽃축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신도림 건물 옥상에서는 63빌딩과 국회의사당 등 여의도 일대가 잘 보였다. 여의도 상공에서 불꽃이 터지면서 나오는 화학물질이 바람을 타고 신도림 건물 옥상에 있는 센서까지 도달하면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값 변화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다만 이날 바람이 여의도에서 신도림 반대쪽으로 불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던 터라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가 제대로 포착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측정장치 점검을 마치고 건물 지하로 내려가 저녁을 먹은 다음 다시 옥상으로 올라오니 이미 하늘은 어두웠다.

여의도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은 멋졌다. 우리는 옥상에 서서 화려한 불꽃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컴퓨터 화면에 뜨는 이산화탄소 농도 그래프를 확인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민경은 교수는 몸으로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다가 드디어 여의도에서 신도림 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 불꽃이 한창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1~2분쯤 지났을까, 이산화탄소 농도 그래프가 위로 뾰족하게 올라갔다. 지상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이 달린 작은 센서 하나가 수㎞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공기의 변화를 감지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과학적 원리가 이미 검증된 일상적 측정이라고 해도 비전문가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불꽃축제의 영향 측정에 성공해 기뻤지만, 이 거대한 도시에서 매일 만들고 배출하는 게 얼마나 될지 상상하면 아득하기도 했다.

지상 200m 옥상에서 경험해서 더 극적으로 느꼈겠지만, 과학연구란 대체로 이런 식일 것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센서를 하나 들고 서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것, 그 기록을 실험실로 가져와 이론과 맞춰보면서 분석하는 것, 그 결과에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잘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 단순하고 명쾌한 일 같지만, 머리로만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건물주를 만나 설득하고, 옥상에 올라가 센서를 달고, 데이터가 전송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연구비와 인력에 제한이 없다면 민 교수는 한반도 전체에서 배출되는 모든 오염을 측정할 만큼 다양한 센서를 더 많은 옥상에 설치하고 싶을 것이다. 그에게 대기화학 연구는 “하나의 종에 불과한 인간”이 지구에 무엇을 배출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깨닫는 최소한의 몸짓”이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 8월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제도 혁신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 한국에서는 과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떨어뜨리는 일이 많았다. 후쿠시마 오염수에 관해서는 과학을 믿어야 한다는데, 과연 누가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고 분석해서 내린 어떤 결론을 믿어야 하는지 보통 사람은 알 수가 없었다. 불꽃축제 며칠 전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이 발표됐지만, 내년 연구개발 예산 삭감을 두고 논란이 한창인지라 우리도 노벨상을 탈 수 있는지 혹은 꼭 타야만 하는지 따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날 옥상에서 만난 과학자들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과학의 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들은 센서를 점검하고 데이터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과학자들과 함께 불꽃축제 구경도 하고 측정도 하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니 잠시 다른 세계로 갔다가 돌아온 느낌이었다. 과학자들은 광주행 기차 시간 때문에 서둘러 떠나야 했고, 참관과 촬영을 잘 마치고 기분이 좋았던 우리는 맥주 한잔 할 곳을 찾았다. 불꽃축제가 끝난 거리의 공기는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열기가 채우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옥상의 센서를 다시 찾아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북적이는 도시의 상공에서 묵묵히 그러나 분주히 일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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