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①] '데블스 플랜' 하석진 "'독고다이' 우승, 구질구질한 플레이 싫었죠"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상금 2억5000만 원이요?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서 통장에 그대로 뒀어요. 제가 우승하는 건 예상 못했거든요. 이걸 고민하는 것까지 '데블스 플랜'인 것 같아요."
배우 하석진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넷플릭스 예능 '데블스 플랜'(연출 정종연) 최종 우승자이자 상금 2억5000만 원의 주인공이다. 종이와 펜을 앞에 두고 질문을 받아적으며 여유롭고도 신중하게 대답을 고르는 모습이 그가 어떻게 이 서바이벌의 우승자가 됐는지 설명해주는 듯 했다.
'데블스 플랜'은 변호사, 의사, 과학 유튜버, 프로 게이머, 배우 등 다양한 직업군이 모인 12인의 플레이어가 7일간 합숙하며 최고의 브레인을 가리는 두뇌 서바이벌 게임 예능이다. 앞서 tvN '더 지니어스', '대탈출' 시리즈 등 탄탄한 세계관의 추리 장르 예능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정종연PD의 신작이다. 하석진은 프로 바둑기사 조연우, 아나운서 이혜성, 배우 이시원, 그룹 세븐틴 멤버 승관, 정형외과 의사 서유민, 미국 변호사 서동주, 방송인 박경림, 대학생 김동재, 프로게이머 출신 기욤, 과학 유튜버 궤도, 여행 유튜버 곽준빈을 모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정종연PD님과 연이 있었죠. '문제적 남자' 회식 자리에서 가끔 뵌 적은 있지만 연락처를 아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저를 눈여겨보셨나 봐요. 사실 처음엔 뭘 하는 건지도 몰랐어요. 그냥 '합숙할 거고 게임하고 놀다 가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즐겨본 적은 없어서 미리 뭘 준비한다기보다 그냥 가서 겪기로 했죠."
기존 서바이벌 게임 프로그램들과 '데블스 플랜'의 가장 차별화된 포인트는 합숙 시스템이었다. 정종연PD는 전작과 달리 모든 출연진들이 7일간 작은 사회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도록 설계했다. 두뇌 게임, 메인 매치, 상금 매치 등 게임의 전 과정은 물론 합숙으로 플레이어들의 심리전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덕에 시청자들은 이들의 관계 변화를 빠짐없이 지켜보면서 드라마 같은 스토리라인을 즐길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 역시 한층 몰입해 진정성 있는 게임을 만들었다.
"고립됐다는 게 감정적으로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모든 통신 수단이 끊긴 공간에서 며칠 지내니까 하루가 엄청 길었어요. 시간적 확장을 느꼈달까요. '기욤이 떨어진 게 어제였어?' 하고 깜짝 놀란 적 있어요. 지구상에 딱 12명만 살고 있었는데 그중 1명이 떠나는 느낌이라 누군가 탈락하면 유독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고립이 주는 힘이 확실히 있었어요."
김동재, 궤도 등이 첫 게임부터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하석진은 후반부로 갈수록 돋보인 플레이어였다. 매번 새롭게 주어지는 환경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최고의 수를 뽑아냈고, 감옥에서는 피스의 비밀을 풀고 블라인드 오목 대결에서도 승리해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도 했다.
"드라마는 배역으로 얘기한다면 여기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걸 보여줘야 해요. 근데 또 게임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어느 정도 속여야 돼요. 게임에 진심으로 임하지만 어떤 마음인지 안 들키는 것도 제 역할이었어요. 그 선을 잡는 데 좀 시간이 걸렸어요. 제가 이해하는 속도가 느리거든요. 그래서 장르적 특성을 빠르게 적응한 친구들에 비해 초반엔 이용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특히 출중한 게임 실력 못지않게 주목받은 건 하석진의 소신 있는 플레이였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앞서 패를 가르고 친목과 반목을 거듭하는 동안 하석진은 타인에게 의지하는 대신 혼자 힘으로 밀고 나갔다. 그의 뚝심 있는 플레이는 문제를 풀어가는 쾌감을 안긴 동시에 장르적 특성에 걸맞는 재미 요소를 만들어내며 많은 시청자들의 응원을 얻었다.
"처음에 활약이 부족해서 약자의 환골탈태처럼 보인 것 같은데 저는 제가 약자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독고다이'일뿐이었죠. 그래서 '언더독'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응원을 받게 된 것 같아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운이 좋았죠. 저는 누군가한테 의존하지 않은 건 맞아요. 모든 건 능동성에서 기인한다고 보거든요. 잘 못 해도 뭘 하려고 하다 보면 뒷걸음질 치다 잘 되기도 하니까요. 솔직히 나이 마흔에 스무 살 친구를 어떻게 이기겠어요.(웃음) 다만 '구질구질하게 플레이하진 말자'는 마음만큼은 기저에 깔고 있었고, 덕분에 좋은 결과도 나온 것 같아요."
하석진의 '데블스 플랜' 우승은 아주 의외의 결과는 아니었다. 지난 2015년부터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에서 약 4년간 활약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쌓아온 덕이다. 예상 가능한 활약 안에서도 그는 능동적인 플레이로 끊임없이 새로운 변수와 재미를 만들어내며 시청자들에게 게임 예능의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하석진에게는 스스로도 몰랐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기회가 됐다.
"거울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제 새로운 가능성을 봤어요. 예를 들어 '오목 못 두시네' 같은 말이 대본에 쓰인 대사였다면 시선 처리를 그렇게 안 했을 것 같은데, 다시 보니까 제가 공간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이더라고요. 오목 둘 때도 엄청 못생기게 나오는데 연기였다면 좀 더 멋있게 보이려 했겠죠. 내가 진짜 감정일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거대한 관찰 영상 자료를 얻은 기분이에요. 지적인 이미지를 굳힌 것도 좋죠. 근데 그게 배우로서 도움이 되는진 모르겠어요. 일단 멍청한 역할은 못 하니까.(웃음) 그래도 언젠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eun@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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