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요? 인종차별적 질문입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안산역 2번 출구, 안산유통상가에 들어서면 간판, 고무, 금속, 기계장비, 도장 등 각종 품목을 취급하는 업체의 간판이 끝없이 이어진다. 1989년 지어진 건물 25채에 점포 2000여 개가 들어서 있다. 그중 한 상가 3층에 ‘방송국’이 있다. 안산공동체미디어 ‘단원FM’이다. 대부금융과 전기공사 업체를 가로질러, 그 문을 두드렸다. 정혜실 단원FM 본부장이 나왔다. 라디오 부스에서는 녹화가 한창이었다. 안산 시내를 샅샅이 뒤지다 월세가 저렴한 이곳을 발견해 지난해 입주했다. 창고는 방송국이 되었다.
정혜실 본부장은 2000년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이주 인권 활동을 시작했다. 20년 넘게 결혼 이주민, 난민,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족을 만나며 한국다문화가족협회 대표, 이주민방송(MWTV) 대표를 지냈고 현재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출간했다. 공저자로 참여한 적은 있으나 단행본은 처음이다. 200여 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국제결혼 당사자로서, 이주 인권 활동가로서 목격한 한국 사회 인종주의의 역사와 제도의 한계를 집약적으로 담았다.
모든 건 파키스탄 출신 남편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1994년, 서울 이태원에서 마주친 한 외국인이 정 대표에게 차 한잔 하자고 말을 걸었다. 몇 번 거절하다 문득 ‘차 한잔이 뭐라고, 백인이었어도 이렇게까지 거절할까 싶어’ 승낙했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막 들어올 때였다. “합법적 체류자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었던 시기다. 한국과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관광비자로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가 많았다. 무슬림 레스토랑이 이태원에 유일하게 하나 있을 때였다.” 정 대표가 당시를 회상했다.
어렵사리 성사된 자리, 차를 마시며 한국과 한국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지금의 남편이 답했다. “어딜 가도 좋은 사람 있고 나쁜 사람 있는데, 왜 한국 사람은 만나면 그것부터 물어보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던 정 대표는 당황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한국인의 특성을 꼬집은 답변이었다. 허세가 없고 사람이 괜찮았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파키스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귀국과 동시에 남편의 처우에 의문을 품게 된 ‘사건’을 겪었다. 김포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남편을 불러세웠다. 자국의 배우자와 동반해 들어오는 길이었고 비자면제협정이 있어 따로 조사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랬다.
불쾌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 전 연애를 할 때 남편과 있는 걸 본 한 취객이 정 대표를 향해 ‘양공주’라 불렀다. “양공주라고 호명되었을 때는 단지 외국 남자를 만나는 것뿐이고 귀한 집 자식인데 나를 함부로 부르다니, 이런 식의 불쾌함이었다. 당시에는 차별로 인식하지 못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경험은 달랐다. 직원의 태도만 해도 그렇다. 미국 사람이라도 이렇게 했겠냐고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 아니라고 답하더라.” 그 일을 겪고도 인종차별이라는 생각보다 ‘국력이 약하면 무시당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했다. 돈을 벌고 성공하면 무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인종차별보다 먼저 다가온 성차별
먼저 체감한 건 인종차별보다 성차별이었다. 결혼을 해도 주민등록등본에 정 대표 혼자였다. ‘서류상 혼자 사는 여자’였다. 당시에는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 남성에게 한국에 정착해 살 수 있는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자녀도 외국인으로 등록되어 건강보험과 공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국적법이 부계주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이 남성과 다른 처우라는 건 알았지만 법적으로 그럴 줄은 몰랐다. “서류를 봤을 때 눈물이 콸콸 났다. 누가 갑자기 구름 위에 있던 나를 밀쳐 바닥에 쿵 떨어진 느낌이었다. 남성과 내가 동일한 시민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나는 열등한 존재였다. 남자는 외국에서 아내를 데려오면 주민등록증을 줄 수 있지만 여자가 남자를 데려오면 같이 (한국 밖으로) 나가라는 말로 느껴졌다.” 국제결혼에서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왜 동시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해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인류학을 공부했다. 이론적 무기를 얻으며 비로소 해석할 힘을 갖췄다.
법을 바꾸기 위해 공부했는데 공부가 끝날 무렵 그보다 앞서 비슷한 일을 겪은 당사자들의 투쟁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1997년 국적법이 개정되면서 자녀도 공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01년 남편이 귀화시험을 통과했고, 2005년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중국적이던 아이들은 남편의 귀화와 동시에 자동으로 한국 국적이 되었다. 파키스탄 역시 자녀를 아버지에 종속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정 대표의 자녀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종주의의 핵심에 우열 매기기가 있다고 정 대표는 설명한다. 연애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라는 개념 자체를 잘 몰랐다. 방송에서 이들의 처우를 상징하는 “사장님 나빠요” 같은 유행어가 나오기 전까지, 오히려 남편은 ‘영어 쓰는 외국인’으로 존중받았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마찬가지로 영어가 공용어인 데다 전공이 영어였다. 남편은 한국인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알고 지하철에서 대화를 할 때 정 대표에게도 영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모든 외국인은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이주노동자가 직군처럼 만들어지고 산업연수생 제도가 붙고 그들이 겪은 피해 사례가 부각되면서 위계가 생겼다. 신문 방송을 통해 ‘맞는 사람’ ‘임금 떼이는 사람’ 이미지가 생기고 이들을 점점 하층 노동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게 되었다.”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도 위계는 있었다. 유독 아시아 출신 결혼 이민자 자녀들에게 ‘다문화’라 명명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백인과 한국인이 결혼한 경우 ‘글로벌 패밀리’로 구분되었다. 같은 국제결혼이어도 ‘다문화 가정’과 ‘글로벌 패밀리’가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결은 전혀 다르다. 전자에게 성실하고 모범적인 이주노동자 이미지를 기대한다면 후자에게는 훨씬 관대하다. 다문화로 규정되는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레 학습부진, 서툰 한국어 등의 꼬리표가 붙었다. 이주민 지원 단체와 연구자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시기마다 지원 프로그램의 트렌드가 있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오케스트라가 한때 유행했고 미술치료, 웃음치료가 차례로 지나갔다. “나쁜 의미로 접근한 건 아니지만 치료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이주민 가정을 정상에서 비켜난 사람들로 상정하고 계획을 잡는다. 교육으로 바로잡거나 지원해야 할 대상이라는 시각이 담겨 있다. 한국말을 잘 못할 거라는 편견 때문에 한국어를 잘하는데도 교육을 한다. 취지와 달리 자녀들이 단체나 연구자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 대표 개인은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드센 엄마’ 노릇을 했다. 대신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학교에 자주 가고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했다. 같은 상황에 놓인 파키스탄 커플과 모임을 갖기도 했다. 정 대표는 “지금 생각하면 젊을 때 참 방어적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날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차이에 대한 차별’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알고 지내는 파키스탄인의 딸이 학교 선거에서 전교 회장에 당선됐는데, 한 학부모가 투표 결과를 못 믿겠다며 재검표를 요구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에서다. 결국 재검표를 통해 당선이 확정되었다. 교사의 태도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의 학업성취도가 낮으면 당연하게 여기고, 높으면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다.
정 대표의 아이들은 학교생활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끼리는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았다. 자녀의 친구들 중에는 집에 놀러온 뒤에야 아버지가 파키스탄 출신이라는 걸 인지한 경우도 있었다. 사회적 시선은 학교 현장에서 공고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상대로 가정 형편을 조사한 적이 있다. “집이 부자라고 느끼는지 가난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나 보다. 아들은 집이 가난하다고 쓰고 딸은 부자라고 썼다. 같은 집인데 다른 게 웃겨서 물어봤더니 아들은 친구 집에 있는 세콤(민간 경비 시스템)이 우리 집에 없다면서 가난하다고 했고, 딸은 먹을 거 다 먹고 살 거 다 사는데 뭐가 부족하냐며 부자라 답했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빈곤의 차이가 있는데 이런 식의 설문을 통해 수치화된 통계가 정당할까 의문이 들었다.”
‘누구에게 체류 자격을 부여할 것인가’
‘다문화’라는 단어가 집단적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에도 편견이 담겨 있다. 이주 인권 활동을 하며 기자를 많이 만났다.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했다. 미등록 이주 아동의 교육권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취재를 하러 와서 목적과 달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부모 초청으로 한국에 머물다 미등록 상태가 된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은 스스로를 한국 사람으로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라고 답하면 엄마 아빠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너는 다른 사람’이라고 각인시키는 질문이고 좀 무례하다고 느꼈다. 귀화를 하면 한국인인데, 국적으로서의 한국인이 아니라 순혈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인인지 확인했다. 한국기자협회에서 인권보도준칙(제5장 이주민과 외국인 인권)을 문구 하나하나 고민하며 만들었지만 준칙일 뿐이고 어떤 태도를 갖고 임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정 대표도 처음에는 외모가 다르니 익숙하지 않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사례를 접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도 그렇고 미국 내 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3세, 4세가 아직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말에 한국 사람들이 인종차별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인종차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악의 없이 묻는 거라 믿고 싶어 했다.
정혜실 대표가 이주 인권 활동에 발을 들인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엔 당사자로 싸웠다. 의외로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성이 많았다. 지금은 없어진 프리챌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고 정규모임을 가졌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다. 그사이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와 결혼한 한국 여성의 주체성’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다문화와 관련된 첫 학술서에 실리기도 했다. 특히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현 안산이주민센터)에서 활동하며 시야가 넓어졌다. 이주민이라고 다 친밀한 건 아니고 결혼 이주 여성과 한국 여성 간에도 위계가 있었다. 국제결혼이라는 범주에 제한되어 있던 관심사도 확대됐다. 이번 책에서도 가짜 난민이라 낙인찍혔던 예멘 난민을 비롯해 입국허가를 받지 못해 공항에 체류 중인 난민 신청자의 이야기를 두루 담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며 성소수자와 장애인의 인권부터 아동과 노인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알고 챙겨야 할 이슈가 더 늘었다.
‘누구에게 체류 자격을 부여할 것인가.’ 여전히 예민한 질문이다.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 바뀐 지 20여 년, 중도 귀국 없이 10년 체류의 길이 열리고 비자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얼핏 보면 기준이 완화된 것 같다. 정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자 발급이 유연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촘촘해졌다. 결혼 이민자 안에서도 나뉘고, 좀 더 세밀해졌다. 사람을 가르는 거다. 어떤 집단을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책 대상으로 포함해야 할지 고민한 결과다. 이주민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달라졌다.” 단적으로 이주노동자는 여전히 가족 동반 비자를 받을 수 없다. 방문 비자도 마찬가지다. 청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연애, 결혼, 출산 등 자연스러운 생애 과업에 맞닥뜨릴 때마다 벽에 부딪힌다. 일하는 여성의 경우 임신을 하면 보통 사업장에서 임신중지를 권유받거나 본국에 돌아가 아이를 낳은 뒤 맡기고 돌아온다. 한국에서 아이가 태어날 경우 출생신고조차 못해 미등록 상태로 살아야 한다.
책에는 정 대표가 만난 미등록 이주 아동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출생 등록이 안 되어 있어 숫자 파악조차 쉽지 않은 이들은 어릴 때 의사, 탤런트가 되고 싶다고 얘기하다가도 언젠가부터 조용해진다. 노력해도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다. 나중에 부모의 고국에 정착하더라도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그곳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시민사회단체는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체류 자격과 별도로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제도다. 등록번호만 있어도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소풍, 수학여행을 갈 때 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그게 안 되어 있어서 행사가 있을 때 밖에 못 나간다. 출생등록제 도입을 위해서 노력했던 분들이 사실 미등록 이주 아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한국 아동의 미등록 상태를 발견하고 가시화하는 데 일조를 했는데, 결론적으로 한국 아동만 등록되고 미등록 이주 아동은 또 유예된 상황이다. 한국인 개개인이 가진 인종주의의 문제가 한쪽에 있고, 제도가 그걸 공고하게 뒷받침한다. 특정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20년 넘게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몸이 고장났다. 골병이 날 정도로 아팠다. 정 대표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싸움이니까 해보는 데까지 한다는 생각으로 왔다”라고 말했다. 이주민 방송을 하며 고비가 왔다. 활동을 멈추고 그동안 해온 운동을 정리해보고 싶던 차에 출간을 제안받았다. 쉼표를 찍고 싶었지만 뜻대로 안 되었다. 사임한 지 2주 만에 주변의 강력한 권유로 공동체라디오 설립에 뛰어들었다. 그의 활동을 오랫동안 반대해온 남편은 이제는 포기 상태다. “남편은 내가 운동을 통해 바꾸려고 했던 제도 변화의 혜택을 하나도 못 받았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이게 다 당신과 결혼해서'라고 항변한다. 사실 남편이 가정경제 대부분을 담당해준 덕분에 활동할 수 있었다. 그의 인내심으로 유지해온 셈이다.” 지난 20년, 제도는 크고 작게 바뀌었지만 한국 사회 차별과 혐오의 우물도 깊어졌다. 쉼표를 찍으려는 정혜실 대표의 시도가 요원해 보이는 이유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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