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멎게 하는 안세영과 김동률의 '어나더 레벨'
예술가와 운동선수의 공통점을 찾는 건 쉬우면서도 때론 힘들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운동선수는 반복과 훈련이 중요한 반면, 예술가는 기발한 생각과 창의력이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이들이 평범한 이들보다 더 다르거나 뛰어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의 레벨이 또 어떤 차원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이라고 한다.
영화 '마녀'에서 뛰어난 신체능력을 소유한 주인공 구자윤(김다미)과 귀공자(최우식)가 성인이 돼서 한판 맞붙을 때, 귀공자가 "예전의 내가 아니다"며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과시하지만, 구자윤이 이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너하고 나는 레벨이 달라."
레벨이 한 단계 높은 사람의 경기나 무대는 시선을 단박에 압도한다. 보는 이의 집중은 기본이고 탄성과 감탄은 필수다. 눈물은 형언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이런 감정으로 소모할 수밖에 없음을 은연중 알려주는 신호로 작용한다. 어떤 말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땐 침묵을 동원하기도 한다.
10월 초, 스포츠와 대중예술 분야에서 '어나더 레벨'을 선보인 두 사람을 동시에 목격했다. 여자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 안세영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올랐다. 금메달 2개를 목에 건 기록보다 더 시선을 집중시킨 장면은 그의 '어나더 레벨'이었다.
8강전에서 맞붙은 태국 선수는 경기 직후 어떤 공격도 받아내는 그의 압도적 수비력을 치켜세우며 "안세영, 대박"이라고 외쳤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당해내기 어려웠던 세계 3위 천위페이(중국)와의 결승전에서는 무릎 부상에도 투혼과 강약 조절로 경기를 흔들림 없이 이겨냈다. 시청자들은 금메달을 목에 건 다른 선수들 경기와는 색다른 감정과 호흡으로 이 경기들을 지켜봤다.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게 숨죽이며 본 세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압도적 기량에 보내는 감탄과 탄성이었다.
'어나더 레벨'은 순간의 경험을 정지시킨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그 후유증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경기가 다음 날 되살아난다. 한 차원 다른 수준의 경기력이 보여준 잔상은 그렇게 오래, 깊이 남을 수밖에 없다. 야구나 축구가 금메달을 따도 이들보다 비주류 종목인 배드민턴의 안세영이 여전히 회자하는 이유는 '어나더 레벨'과 사력을 다하는 '투혼'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 강렬함은 얼마 전 6회 공연에 6만 관객을 모은 발라드 가수 김동률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발라드는 흔히 '노래 잘하는' 가수 중심으로 꾸려지기 마련이어서 다른 구성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의 무대는 '무대' 자체가 '어나더 레벨'이고, 이를 끌고 가는 '인적 자원'의 구성과 능력 역시 한 차원 앞선다.
예를 들어, 흔히 오케스트라와 재즈빅밴드는 독립 구성으로 정의되지만, 이 무대는 그런 기존의 룰을 어김없이 깨버린다. 클래식적 고루한 문법과 재즈적 자유로운 날갯짓이 서로 뒤엉켜 독창적이고 스타일리시하고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멋의 향연을 쉴 새 없이 뿜어낸다.
가스펠 합창단이 아니고서 코러스 팀은 대개 3명인 경우가 흔한데, 이 무대는 무려 8명이나 내세웠다. 그렇게 많은 화음이 모이면 메인보컬인 김동률의 음정을 방해하거나 서로 방해되거나 주객이 전도될 수 있는 우려가 컸지만, 한 치의 오차 없이 세기를 알아서 조절하는 수많은 훈련과 타고난 능력을 보고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운드의 예술적 조절'은 밴드 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드럼과 베이스는 그 흔한 듣는 이의 '(둔탁한) 귀 때리기' 같은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았고 두 대의 기타 역시 음 하나에 실린 감정의 변화를 포착한 절제의 연주로 '어나더 레벨'을 선사했다.
작곡자로서 타고난 능력부터 어나더 레벨이었던 김동률은 수많은 발라드 연가(戀歌)들을 저음으로 시작해 고음으로 연속 터뜨리는 도돌이표 행진 속에서도 투혼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이 사랑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드러낸다. 그렇게 그는 듣는 이의 남은 감정의 찌꺼기까지 건드리는 '감정 사냥꾼'이기도 하다.
어나더 레벨은 이들의 과거나 성향, 고집에서 대략 파악된다. 안세영은 세계 정상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하체 힘을 키우기 위해 매일 100kg 스쿼트를 밥 먹듯 했고 단 하루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또 운동을 자연스럽게 '사랑'했다.
김동률의 레벨은 크리스마스에 부를 곡을 여름부터 선곡해 연습하는 완벽 성향에 관객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보다 (어린 시절 학예회에 나가는 아이처럼) 내가 이 무대를 어떻게 잘 꾸려나갈까에 오로지 집중하는 스타일에 기인한다.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그게 4년이든, 5년이든 섣불리 무대에 나서지 않는 게 김동률 스타일이다. 결코 "추억을 먹고 사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다"는 다짐 역시 앞선 행보를 짐작케한다.
안세영도 과거의 '그'는 이미 잊힌 지 오래고 앞으로 성장할 '그'와 마주칠 일만 남았다.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가진 언론 인터뷰는 그 의미를 더욱 부각한다. "많이 지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었다. 승부에 집착하는 배드민턴 말고 좀 더 내가 원하는 배드민턴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나더 레벨을 향한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인기는 개나 줘버려' 같은 시쳇말로 요약된다. 안세영은 자신에게 쏟아진 각종 인터뷰와 광고, TV프로그램 출연 등을 한사코 거절하며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 평범한 운동선수"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도달할 목표가 있으니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려 한다"고 했다.
김동률은 TV 프로그램과 거리를 두는 드문 뮤지션이다. 조용필이 1990년대 초반 '정직한 공연' 또는 '어나더 레벨의 공연'을 위해 TV에서 탈출한 것처럼, 김동률 역시 '자신의 무대'를 위해 TV를 피하고 있다. 이번 무대에서 그는 마지막 멘트로 이렇게 말했다. "인기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늘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겠다. 조금 더 늙어서 다시 만나자."
그의 '불안'은 인기의 상실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인기가 음악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더 늙어서' 만나야 하는 이유 역시 완벽한 준비를 위한 시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적지 않은 고통과 예술혼을 불어넣기에 우리는 감동하고 그 순간에 천착하며 산다. 그런 인상 깊은 장면들을 뇌리에 깊이 새겨준 그들의 선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감탄하거나 눈물 흘리거나 침묵하는 일일 것이다.
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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