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노벨문학상 욘 포세가 언어로 적중시킨 ‘어둠 속 빛’
국내 첫 번역 작품 ‘멜랑콜리아’
자국화가 헤르테르비그 되살려
간결하고 집요한 ‘포세체’ 시현
멜랑콜리아 Ⅰ-Ⅱ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l 민음사 l 1만7000원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4)의 희곡이 국내 초연된 때는 2006년이다. 지난 5일 수상자 발표 때 한림원이 “또다른 주요 성취”로 언급한 희곡 ‘가을날의 꿈’(1999)이었다. 당시 작품을 연출했던 송선호 중부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2017)에서 “포세의 전 작품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독백”이라고 설명한다.
희곡뿐만 아니라 시, 소설 등을 아울러 포세에게 독백은 형식이고 내용이며 목적이자 결과다. ‘인생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자신의 세계관 아래, 더더욱 “일반적 대화로는 불가능한 내면의 표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독백”(송선호)이다. 한림원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의 작가로 욘 포세를 간추린 맥락일 것이다.
이때의 문체는 간결하고 음악적이되 집요하고 때로 강박적이다. 독백체가 돋보이는 소설 중 하나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국내 첫 소개된 욘 포세의 소설 ‘멜랑콜리아 Ⅰ-Ⅱ’(1995~96)다.
“나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나는 한스 구데를 만나기 싫다. 나는 한스 구데가 내 그림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을 듣기 싫다. 나는 오직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을 뿐이다. 나는 오늘, 한스 구데를 만날 기력이 없다”로 시작되는 소설은 몇 쪽을 지나서도 “나는 밖에 나가기 싫다. 나는 화가다. …한스 구데의 제자다. …나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있는 화가다. …나는 그림을 정말 잘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못 그리니까. 한스 구데는 바로 그런 말을 할 것이다”에 머무른다. 하지만 침체가 아니다. 의식도 행위도 나아간다. 원을 그리며 팽창하는 언어랄까. 그 원심력으로 구체적 정보도 서서히 하나씩 던져진다. “나는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빛도 사라질 것이다”로까지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19세기 노르웨이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후원자를 만나 독일로 유학한다. 그때 뒤셀도르프 예술학교의 스승이 한스 구데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의 냉대로 환국하고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한다. 가난과 망상, 자기비하에 고립된 그가 그려낸 그림은 사후 ‘신비주의적 풍경화’로 재평가된다.
소설은 실명과 연혁에 기반하므로 사실상 전기인데, 행적 대신 심리의 궤적을 좇는다. 바로 그것이 헤르테르비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위해, 올리네라는 가상의 누이가 화자(Ⅱ부)로 등장해 동생을 좇는다. 이미 라스가 ‘숨진’ 1902년으로부터의 전개다. Ⅰ부 말미엔 19세기 말의 그림 한 점 앞에서 “생의 가장 큰 경험을 했다”는 20세기 말 작가 비드메가 등장해 헤르테르비그를 복기한다. 여전히 라스는 (후대인들에게) ‘살아 있는’ 1991년으로부터의 전개다.
이 소설엔 희곡 ‘가을날의 꿈’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견인하는 중대 사건이랄 게 없다. 내면이 곧 사건이다. 그 내면에 적중할 때까지, 아기살(작고 짧은 화살)을 쏘듯, 언어를 분절하고 생략하고 환원하는 ‘포세체’는 집요하면서도 퍽 유희적이다. 아득한 심리를 분절해내는 방식이고, 독자에겐 지루하여 흘려보내거나 오래도록 홀리는 지경을 경험시킬 것이다.
‘멜랑콜리아 Ⅰ-Ⅱ’는 중역을 거치지 않고 국내 직역된 욘 포세의 첫 작품이다. 이를 옮긴 손화수씨는 한겨레에 “포세 문학의 특징은 단어의 반복을 바탕으로 한 리듬”이라며 “외면적으로 반복을 바탕으로 하는 리듬감이 살아 있고, 내면적으로는 철저하게 주인공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을 통해, 지능이 떨어지든 치매에 시달리든…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인간 개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 거장이라는 평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노르웨이에서 활동하는 손 번역가는 “포세의 글은 어렵지 않다. 절대 현학적인 단어가 없다. 반면 작가 특유의 문장 구성과 내재된 미묘하고 즐거운 리듬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6년 7월 ‘가을날의 꿈’이 초연될 때 극단은 “현대 연극의 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고독, 절망을 묘사하지만 특별한 스토리나 갈등구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소개했다. 당시 배우가 김윤석이다. 욘 포세를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욘 포세는 ‘21세기 베케트’로 수식된다. 스스로 노르웨이 소설가 타리에이 베소스, 오스트리아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과 함께 가장 영향받은 작가로 사뮈엘 베케트를 꼽는다. 하지만 포세는 베케트가 붙든 ‘생의 의지’와도 대비될 만큼의, 비관도 낙관도 아닌, ‘생의 관조’를 특징으로 한다. 손화수 번역가는 스칸디나비아 문학을 “지리멸렬한 회색지대의 문학”으로 묘사한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해 지기 전 차 없는” “헤드라이트도 도움 안 되는” 북유럽 기후 문학이다.
그 포세가 이 소설에선 주인공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녀의 눈을 자주 그렸다. 나는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자주 그렸다. 빛을 머금은 하늘. 구름이 떠 있는 하늘. 나는 그녀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빛 속에서, 구름이 떠 있는 하늘 속에서.”
그때 누군가는 “빌어먹을 얼간이!” “죽어 버려!”… 소리치지만, 주인공은 원을 그리듯 말을 짚어 나아간다.
“나는 오솔길 아래쪽으로 발을 옮겼다. 나는 오늘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도망칠 것이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노벨 문학위원회 위원장 앤더슨 올슨이 특별 언급한 욘 포세의 작품은 셋이다. 장편 ‘닫힌 기타’(1985), ‘아침 그리고 저녁’(2000),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길게 쓰인 최신작 ‘새로운 이름: 7부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닷새 동안 국내에서 욘 포세의 책은 올해 판매 누적치의 52배 더 팔렸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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