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함께한다’는 것 [책&생각]
허물어지는 고정관념, 차별과 위계
인간과 사회, 예술의 본질을 묻고
경계 넘어 찾은 따뜻한 ‘함께하기’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지음, 김영현 옮김 l 다다서재 l 2만2000원
일본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사는 시라토리 겐지(54)는 ‘전맹(全盲) 미술 감상자’다. 시력이 0으로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인 그는 매년 수십 번씩 미술관에 다닌다. 매일 산책을 하며 오른손에는 흰지팡이를 들고 왼손으로는 디지털카메라를 배 쪽에 댄 채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는, 사진가이기도 하다. ‘눈이 보이는 사람’ 대부분은 아마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눈이 안 보이는데 미술 작품의 형태와 색깔 같은 시각정보를 인지할 수 있나? 아주 어렸을 때엔 눈이 보였기 때문에,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시각정보에 기대는 것일까? 아니면 시각이 아닌 촉각을 활용하는, 즉 ‘만질 수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인가? 사진을 찍는다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포착하여 찍는 걸까?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51)는 시라토리와 함께 여러 미술관에 다니며 미술을 감상해온 여정을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에 담았다. 미술애호가 친구의 소개로 시라토리를 처음 만났을 때, 지은이 역시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관성적으로 품을 법한 의문들을 품었다. 그러나 시라토리와 ‘함께하는’ 사이, 본다는 것, 예술, 인간과 사회 등에 대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 속 고정관념들이 점차 허물어졌다고 한다.
시라토리가 미술을 감상하는 법은 이렇다. ‘눈이 보이는’ 동행자의 팔꿈치 부분에 살짝 손을 대고 반걸음 뒤에 따른다. 작품 앞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달라’고 하면, 동행자가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래저래 묘사한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한 여성이 강아지를 안고 있다’ 식의 설명이 시라토리에게 전해져 마치 눈이 보이는 사람의 경우처럼 ‘시각화’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흥미는 “‘눈앞에 있는 것’이라는 한정된 정보에 기초해 이뤄지는 즉흥적인 대화”에 있다. 그와 함께하는 동행자는 작품을 더 세밀하고 새롭게 보게 된다. 여성의 얼굴이 슬픈지 어떤지, 배경이 여기일지 저기일지 등 저마다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각자 다른 것들을 읽어내고, 때론 같은 것조차 전혀 다르게 본다는 것도 깨닫는다. 시라토리와 함께 처음 미술관에 간 날, 지은이는 “나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주면서 안전하게 걷도록 해주는 장치, 시라토리씨는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주는 장치”로, “서로의 몸이 서로에게 보조장치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설명으로 그림의 형태와 색깔 등이 과연 제대로 전해졌을까 궁금해하는 지은이에게 시라토리는 말한다. “정답률을 원하면 결국은 ‘시각의 기억’을 얼마나 썼느냐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어. 나한텐 그런 건 하나도 재미없어.” 시라토리가 즐기는 것은 개별 작품들이 아니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행위, 그러니까 미술관 그 자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작품을 보는 행위의 목적은 작품의 이미지를 서로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실마리로 삼으면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는 것, 모르는 것, 그 전부를 한데 아우르는 ‘대화’라는 여정을 공유하는 것”이라 말한다. 시라토리와 함께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미술을 감상하는 프로그램, 전시 등을 함께 만들어온 미토 예술관의 모리야마 준코는 이렇게 말한다. “작품을 보는 방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런 인식의 엇갈림을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 대화하면서 보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시라토리는 어떤 계기로 미술 관람자가 되었을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한마디로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맹학교 졸업 뒤 안마사가 된 그는 ‘맹학교 외의 사회를 거의 모른 채 살아도 될까’ 의문이 들어 대학교에 진학했고, 한 여성과의 데이트를 계기로 미술관에 빠져들었다. “맹인이 미술관에 다니는 건 어쩐지 맹인답지 않은 행동이라 재밌기도 했”단다. 무작정 미술관에 전화를 걸어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말로 설명해달라” 부탁했고, 그때부터 미술 관람자의 길을 걷게 됐다. 한 미술관 직원은 시라토리에게 어느 인상파 그림을 설명하다가 자신이 호수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는데, 그때 시라토리는 ‘뭐야, 눈이 보여도 그렇게까지 잘 보지는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때까지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품었던 열등감,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있던 방벽을 없앨 수 있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시라토리와 함께 ‘우주의 별조차 저항할 수 없는’ 시간과 죽음을 사유하게 만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 고후쿠지 국보관의 불상들, 우리 안의 우생학적 사고와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를 되새기게 만드는 거대 판화 ‘디스림픽 2680’ 등 가자마 사치코의 작품 등을 감상하며 그저 “작품이 잘 보인다든지, 새로운 발견을 한다든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감각과 머릿속을 상상하고 싶다든지” 하는 것 너머의, 좀 더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의 존재와 감각은 저마다 다른데, 그 사이에 우리 전체를 옥죄는 위계와 차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경계를 넘어 새로운 시선을 획득하는 것 자체는 결말이 아니라 출발일 뿐이다. 안대를 뒤집어쓴대도 시각장애인이 될 수 없듯, 우리는 다른 누구가 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뿐이다. “그저 함께 있으면서 웃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지은이는 시라토리를 취재한 중편 다큐멘터리 ‘하얀 새’와 장편 다큐멘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미술을 보러 가다’를 공동 감독으로 제작했다. 시라토리는 2021년 사회복지법인에서 세운 미술관 ‘시작의 미술관’에서 ‘한데 모이다, 서로 의지하다’란 제목으로 자신이 찍어온 사진들을, 자신의 방을 재현해 그곳에서 일상생활을 보내는 ‘겐지의 방’이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미술 감상자에서 ‘표현자’로, 새로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시라토리는 앞서 한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의 작품에도 등장한 바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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