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독일 고전철학 발흥 밑불 된 야코비 신앙철학
야코비와 독일고전철학 대결 탐색
논쟁이 부른 스피노자 르네상스
피히테·셸링·헤겔 등장으로 이어져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
남기호 지음 l 길 l 3만3000원
칸트 철학에서 시작해 헤겔 철학으로 정점에 이르는 독일 고전철학은 서양 근대철학사에서 가장 광휘로운 지적 장관을 보여준다. 50년이 채 안 되는 이 짧은 시기에 철학의 거대한 봉우리들이 잇따라 솟아났다. 이 사유의 격변에 추동력 구실을 한 사람으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1743~1819)가 꼽힌다.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은 야코비를 중심에 놓고 이 논쟁적 철학자가 동시대 철학자들과 벌인 대결을 살피는 저작이다. 멘델스존·칸트·피히테·셸링·헤겔이 야코비의 논전 상대자로 등장한다. 책이 출간되기 전 세상을 뜬 독일 고전철학 연구자 남기호 연세대 교수의 유작이다.
야코비의 삶을 이끈 관심사는 이성적 사유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초월자 곧 신이었다. 이런 근본 관심 위에서 야코비는 학문적 이성으로 신과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 당대 철학자들을 집요하게 비판했다. 학문을 넘어 신앙을 구하려 했기에 야코비의 철학은 ‘신앙철학’으로 불린다.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야코비는 21살에 가업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철학과 문학에 심취해 8년여 만에 가업에서 손을 떼고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야코비는 통상의 학문적 경로를 밟지 않고 당대의 수많은 학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철학적 사유의 토대를 닦았다. 논쟁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야코비였다.
야코비 학문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1780년 여름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1)을 만난 일이었다. 당시 레싱은 독일 계몽사상의 선도자로 추앙받던 사람이었다. 야코비와 만나 철학적 대화를 나누던 중 레싱은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고백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그 시대에 무신론이나 다를 바 없는 위험 사상으로 통했다. 이 대화를 남기고 레싱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몇 년 뒤 야코비는 레싱의 죽마고우인 계몽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이 레싱 기념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멘델스존은 그럴 리가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야코비와 멘델스존 사이에 스피노자 사상을 둘러싼 지상 논쟁이 벌어졌다.
스피노자 사상의 핵심은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명제에 있다.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뜻하므로, 이 명제는 우주 만물이 신이라는 범신론 사상을 내포한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을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라는 말로도 설명한다. 능산적 자연이 ‘자연을 산출하는 자연’을 뜻한다면, 소산적 자연은 ‘자연에서 산출된 자연’을 뜻한다. 여기서 ‘자연을 산출하는 자연’이 스피노자의 신이고, 그 신에게서 산출된 자연이 우리가 아는 자연, 곧 우주 만물이다. 신은 자연을 낳고, 그 자연을 떠나 신은 따로 있지 않은 것이다.
스피노자 범신론에서 더 주목할 것은 ‘자연이 필연성을 따르듯이 자연 자체인 신도 필연성을 따른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신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을 것이다. 야코비는 이렇게 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스피노자주의의 신을 단호히 부정한다. 자유 없는 신은 신이 아니므로 스피노자 범신론은 무신론이 될 수밖에 없다. 야코비는 이 스피노자주의에서 발견되는 학문적 이성에 비판의 칼을 겨눈다. 학문적 이성이란 당대 계몽철학의 논리적 사유를 가리킨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적 신은 그런 ‘학문적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학문적 이성은 자신의 한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 한계 너머의 신을 논리적 사유 능력으로 알아내겠다고 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이다. 이것이 멘델스존과 논쟁하면서 야코비가 내놓은 원칙이었다.
야코비의 목표는 스피노자주의에 깃든 이 학문적 이성의 월권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논쟁은 야코비의 의도를 넘어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여러 학자들이 논쟁 대열에 끼어들자 스피노자 철학에 지식계의 관심이 커졌고 그 관심과 함께 스피노자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이다. 독일 관념론의 거두가 된 피히테·셸링·헤겔이 젊은 날 그 열기 속에 스피노자를 탐구하며 철학을 연마했다. 야코비는 후에 이 세 사람과 모두 논쟁을 벌였는데, 그 논쟁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셸링과 벌인 논쟁이다.
논쟁의 계기가 된 것은 1807년 셸링의 강연이었다. 강연 내용에 격분한 야코비는 책 한 권을 바쳐 셸링의 철학이 스피노자의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야코비가 보기에 셸링은 자연을 “세계의 신성하고도 영원히 창조적인 근원적 힘”으로 모신다. 셸링의 사상은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스피노자주의일 뿐이다. 자연의 필연성을 초월하는 신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격적 신이다. 참된 유신론은 학문적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제약자(신)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느낌’의 경이로움과 그 경이로운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성립한다. 이것이 야코비의 비판 내용이었다.
셸링은 곧바로 반박서를 내놓았다. 반박의 핵심은 야코비가 자신의 ‘자연’ 개념을 오해했다는 것이었다. 셸링의 자연(Natur)은 자연과학적 대상인 기계론적 자연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일차로 ‘본성’(Natur)을 뜻한다. 특히 ‘절대적 동일자’인 신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 본성이 자라나 자유롭게 발현되면 그것이 바로 신의 존재다. 이 신은 절대적 동일자로서 모든 것을 아우르기에 현실의 자연 곧 이 우주 전체도 신의 자유로운 발현에 속한다. 이렇게 셸링은 학문적 설명을 통해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더 나아가 셸링은 학문적 이성에 대한 야코비의 불신도 비판했다. 야코비는 학문적 논증 방식이 결국 무신론으로 귀착한다고 비난하지만, 야코비의 유신론이야말로 학문적으로 무력하고 그 무력함 때문에 무신론에 지고 만다는 것이다.
야코비와 셸링의 논쟁은 각각 강점과 약점이 있었기에 많은 논자들이 편을 나눠 싸웠다. 그 싸움의 파장이 후대로 이어져 키르케고르에게서 시작되는 실존주의로 이어졌음을 이 책은 알려준다. 야코비 철학이 독일 고전철학 발흥을 자극함과 동시에 현대 철학 탄생의 자궁 구실을 한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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