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에 처박힌 기억 [책&생각]

한겨레 2023. 10. 2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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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기 전 아빠는 네 엄마 꼴이 '창녀' 같다며 소리친다.

그저 아빠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그 말이 반복될수록 나의 어딘가가 싹둑 잘렸다는 건 기억할 수 있다.

아빠가 출근한 사이 전화 한 통에 쪼르르 달려오는 꼴을 봐.

"그 전조들이 네게 경고했던, 크고 검은 이방인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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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이르사 데일리워드 지음, 김선형 옮김 l 문학동네(2019)

집을 나서기 전 아빠는 네 엄마 꼴이 ‘창녀’ 같다며 소리친다. 입술 색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아빠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그 말이 반복될수록 나의 어딘가가 싹둑 잘렸다는 건 기억할 수 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면 차를 타고 교회에 간다. 교회에서 우리는 다정한 가족이 된다. 문란은 죄라고 배운다. 문란은 구원과 천국과 멀리 떨어진 단어. 음란은 평생 속죄하고 회개해도 결국 머리채 붙잡혀 지옥에 끌려가 끝없이 불타야 하는 죄다.

어릴 때는 명절이 되면 친척들과 모여 드라큘라 놀이를 했다. 시골 할아버지 집에는 어른들이 들어가지 않는 방이 있다. 창으로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나중에야 그 방이 30여 년 전, 혼전 임신한 이모가 자살한 곳이며 이후 쭉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른들이 건넌방에서 예배하거나 정치 얘기할 때면 몰래 그 방에 모였다. 먼지 쌓인 이불을 깔고 의식처럼 놀이를 시작한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은 드라큘라가 되어 제물을 마음껏 갖고 놀 수 있다. 드라큘라는 제물의 목과 허리를 간질이고, 옷을 벗기고, 귀를 빨고, 몸을 문대기도 한다.

점점 가슴이 커진다. 열두 살에는 생리를 시작한다. 또래 남자애들은 가슴을 만지고 도망치곤 했다. 소리 지르며 그 애를 잡으려 뛴다. 불쾌했어? 그때의 나에게 묻는다. 음, 이건 비밀인데. 나는 걔네가 가슴을 만지는 게 좋았어. 그게 남자애들의 관심과 표현이라던 온갖 구린 정보에 휩쓸려 멍청해진 걸까. 근데 내가 관심 없던 애가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가면 죽이고 싶었어. 분명 차이는 있다. 다행인 일이다.

잘린 조각이 튀어나와 이어지고 겹치고 어긋난다. 조각들 속에서 나는 모른다. 안다.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그저 원한다. 모르는 상태로 원해. 나는 조각났거든. 당신도 그래요? 남자애들은 쉬웠다. 아빠는 내가 쉬운 거라고 말할 테지. 그 말은 틀렸어요. 아빠가 출근한 사이 전화 한 통에 쪼르르 달려오는 꼴을 봐. 쉽잖아. 열여섯, 처음으로 남자애랑 서로의 배꼽을 보고 거꾸로 누워서 몸을 관찰하던 날은 재밌었던 거 같은데. 첫 키스도 설렜는데. 다른 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 조각난 부위는 ‘남자’와의 섹스로 채워질 수 있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남자와 여자는 태초에 하나의 몸이었는데, 조각나버려 우리는 서로를 원한다지? 그래서 외로운 거라지? 흩어진 몸이 만나 합체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지? 스무 살이 지나 그토록 기대했던 섹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엔 실망스러웠다. 이번에도 오답. 차라리 그가 섹스 전과 후에 나를 씻기고,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주는 게 좋았다. 있지, 나는 네가 생각한 섹스 아닌 섹스를 더 좋아했어. 여전히 너는 모르겠지만.

섹스를 쓸 때면 내 문장은 블루. 슬프고 슬프다. 잠시 반짝이던 욕망 뒤에 남은 파란 적막. 그 기억을 뼈에 새긴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시는 기억에 처박혀 살고, 기억은 뼈에 처박혀 산다”는 이르사 데일리워드의 ‘뼈’를 읽으며, 기억을 쪽쪽 뽑아 감히, 그 이야기를 쓴다.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 시인, 활동가인 작가의 멍든 기억을 내 멍과 맞댄다. 당신이 골수에서 빼서 우리 앞에 펼쳐준 문장 앞에서, 당신의 상처와 피가 묻은 그곳에 살포시 내 경험을 올린다.

“그 전조들이 네게 경고했던, 크고 검은 이방인이 나다.”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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