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스토아철학자 세네카의 내면에 들끓는 반스토아주의 열정
세네카 비극 전집 1·2·3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강대진 옮김 l 각 권 2만원
로마제국 시대 초기 스토아학파의 대표자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는 비극작가이기도 했다. 세네카가 라틴어로 쓴 비극 작품은 모두 10편에 이르는데, 이 작품들이 서양고전학자 강대진 경남대 연구교수의 손을 거쳐 우리말로 처음 완역됐다.
고대 비극 작품은 그리스인들이 쓴 작품들이 유명하지만, 로마인들도 그리스인들을 뒤따라 비극 작품을 썼다. 그러나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세네카의 작품 말고는 없다. 세네카의 비극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셰익스피어·코르네유·라신 같은 17세기 극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베리아반도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세네카는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원로원 의원을 지냈다. 어린 네로의 개인교사이기도 했던 세네카는 네로가 황제가 된 뒤 네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자결을 강요당해 세상을 떠났다. 세네카는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본받아 온건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을 사는 중에 철학 작품과 비극 작품을 번갈아 썼다.
세네카의 비극 작품은 거의 모두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헤라클레스’, ‘트로이아 여인들’, ‘포이니케 여인들’, ‘메데이아’, ‘파이드라’, ‘오이디푸스’, ‘아가멤논’, ‘티에스테스’, ‘오이테산의 헤라클레스’가 그것들이다. 유일하게 ‘옥타비아’만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극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 가운데 ‘오이테산의 헤라클레스’는 후대의 위작일 가능성이 있으며, 네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세네카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옥타비아’는 위작이 거의 확실하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세네카의 작품들은 거의 다 에우리피데스나 소포클레스가 쓴 작품들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어서 드라마의 구조와 내용에서 그리스의 영향이 매우 짙다. 그러나 동시에 세네카 자신의 독특한 관점과 미학적 장치가 새겨져 있어 나름의 고유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목할 것은 스토아철학자 세네카와 비극작가 세네카 사이에 드러나는 큰 간격이다. 두 세네카의 태도는 어떤 경우엔 너무 달라 거의 모순되기조차 한다. 메데이아의 복수를 그린 작품 ‘메데이아’에서 그런 충돌을 확인할 수 있다.
콜키스 공주 메데이아는 고대 신화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다. 메데이아는 영웅 이아손을 도와 자기 나라의 보물 ‘황금양털’을 구해준 뒤 이아손과 함께 탈출한다. 메데이아는 친동생을 죽여 이아손을 뒤쫓는 콜키스 함선을 따돌리고, 이아손 고향 이올코스에 와서는 왕권을 넘겨주지 않는 늙은 왕 펠리아스를 토막 내어 죽인다. 뒤에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배신하고 코린토스 공주 크레우사와 결혼하자 크레우사를 불에 태워 죽인다.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복수심에 불타는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두 자식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가 낳은 그 자식들을 이아손 눈앞에서 죽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메데이아가 거의 스토아적인 냉정함(아파테이아)으로 복수를 실행한다는 사실이다. 머뭇거리는 자신을 격려하거나 꾸짖는 모습도 스토아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극의 중간에 메데이아는 자신을 향해 “나는 메데이아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극의 마지막에 복수를 끝낸 뒤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메데이아다. 나의 재능은 악을 통해 성장했도다.” 자기 자신을 완성시켰다는 선언이다. 이 말을 남기고 메데이아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가고, 남겨진 이아손은 비탄 속에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절규한다.
세네카 작품 속 메데이아는 스토아적 침착함으로 스토아적 경건주의를 짓밟는, 가장 반스토아적인 사람이다. 스토아철학자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극의 전개이자 결말이다. 인간 세네카에게 스토아철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어두운 내면세계가 있었음을 이 비극 작품은 증언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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