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먹어…", 고맙고 아름다웠던 장일순 선생님

2023. 10. 2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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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장일순 선생님과 '한살림' 협동운동 창시자들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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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이던가 치악산을 찾았다. 가는 길에 의동생 세브란스 의대 출신 김원천 내과의사를 만났다. 그는 원주 세브란스 의료원에서 내과의로 실무수습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평소에 가장 많이 만나 소주를 기울이던, 마음씨 넓고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과 이해력을 갖춘 후배였다.

그때 김원천 의사의 안내로 김지하 형에게 난(蘭) 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장일순 선생님 댁을 찾아 인사드렸다. 논두렁 곁 작은 텃밭이 있는 나직하고 조용한 집이었다. 약주 한잔 내놓으셨고 벽장을 열어 시가 한 수 적힌 먹지 한 장도 주셨다.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문신 약천(藥泉) 남구만의 잘 알려진 시조였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소중히 여겨 오래도록 갈무리하였는데, 잇단 이사로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시인 지하 형은 도망 다니던 시절 원주에 있는 자기 방 창가에 밖이 훤히 보이도록 손거울 하나를 붙여놓았더란다. 곁방에 있어도 손거울에 반사되어 오는 사람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다.

때로는 원주에서 내 또래 청년 무리와 어울려 치악산 남쪽 신림리 계곡에 뛰어들어 모두가 홀랑 벗고 텀벙거렸다. 오가는 길가엔 옥수수밭, 자줏빛 감자밭이 있었다. 원주는 민주청년 학생운동의 길목이요 은신처였다. 지학순 주교님도 민주운동에 청년들 못지않았다. 지학순 주교 곁에는 늘 장일순 선생님이 붙어계셨다.

인사동 전설이던 민병산 선생님도 생각난다. 인사동에서 대학 후배 안양노와 함께 민 선생님을 모시고, 젊은 화가들의 전통 명소인 부산 막걸리 집으로 갔다. 그때 안양노가 선생님에게 나를 소개하기를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선배라고 하였더니, 선생님은 말씀 대신 조용히 방에서 글자 하나가 쓰인 종이를 건네 주셨다. '수(壽)'자 하나 쓰인 맑은 창호지였다. 나는 말 대신 묵언으로 선생님의 뜻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 시절 문리대 친구 신동수가 나를 명동 가톨릭성당 뒤 전진상(全眞常) 회관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장일순 선생님, 가톨릭 농민운동의 선구자인 정치학과 박재일 선배님, 철학과 최혜성 선배님, 김영주 선배님, 그리고 노래하는 김민기가 와있었다. 농민·농촌의 삶, 노동과 삶의 지혜를 짜내는 자리였다. 김지하 형도 있을 법한 자리였는데, 지하 형은 아마 감옥에 있던 때였을까?

이 모임은 나중에 '한살림 모임'으로 부화(孵化)했다. 내가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 모임의 성격과 방향을 규정해야 했기에 최혜성 선배가 솔선해 '한살림 선언' 초고를 작성했다. 당시 나는 그 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내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철학적이고도 세기를 관통하는 삶의 큰 글문이었으니 말이다.

그 후 나는 안양노 후배와 함께 박재일 선배가 제기동에 개설한 한살림 쌀가게에도 가보았지만 이후로는 통일민주당 정책전문위원이 내 본업이 되어 더는 한살림 모임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나의 인상 한 가지만 남겨 놓으련다. 나에겐 너무도 고맙고 아름다운 순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가을 맑은 날이었을 게다. 어쩌다 장 선생님과 김민기 그리고 춤꾼 채희완, 북잡이 신동수와 함께 공주 계룡산 쪽으로 간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천도교 최재우 선생님과 동학 농민운동 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동학사를 둘러보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계룡산이 보이는 어느 큰 언덕 길가에서 소주 몇 병에 오징어를 뜯던 때의 일이다.

선생님이 나에게 술을 따라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너무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많이 먹어…." 조용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말씀이셨다. 내가 잔을 비우고 공손히 잔을 드리면, 천천히 잔을 비우고 나서 선생님이 다시 내게 술잔을 건네시며 또 하시는 말씀, "많이 먹어…."

나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 공손하게 받아 마셨고, 다시 공손하게 내게 주신 잔을 채워 올렸다. 더는 하시는 말씀이 없으셨다. 내게는 술이 아니라, 선생님의 조용하고 따듯한 마음이 전해왔다. 덧붙여, 아내인 김 화백이 평소에 말하기를,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은 오직 장 선생님 한 분 뿐이라 하였다.

<계속>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생명협동조합교육관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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