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누가 봐요"…교수도, 학생도 발길 '뚝' 짐 싸는 인쇄소[르포]

김지성 기자, 최지은 기자, 천현정 기자, 이병권 기자 2023. 10. 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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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정문 앞 인쇄소는 3곳뿐이다. 한 인쇄소 사장에 따르면 10년 전만 해도 이곳에 10곳이 넘는 인쇄소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이병권 기자

"PDF로 공유받은 교재에서 필요한 부분만 출력했어요. 요즘 누가 책을 다 들고 다녀요."

19일 오전 9시20분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한 24시 무인 프린트 카페에서 만난 대학생 강모씨(25)에게 "어떤 걸 인쇄했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강씨 손에는 인쇄된 용지 10여장이 든 파일이 들려 있었다. 그는 "해외 사이트에서 학술지나 교재 PDF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며 "불법인 건 알지만 다들 공공연하게 쓰지 않냐"고 말했다.

대학가 주변에 자리하던 인쇄소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온 가게도 있지만 이마저도 무인 프린트 카페 등에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정문 앞 인쇄소는 3곳뿐이다. 한 인쇄소 사장에 따르면 10년 전만 해도 이곳에 10곳이 넘는 인쇄소가 있었다고 한다.

경희대 정문 앞에서 16년간 인쇄소를 운영했다는 D문화사 사장은 인쇄소 수입이 줄자 부업을 시작했다. 가게 앞에 방수커버 판매 광고판이 세워져 있다. /사진=이병권 기자


경희대 정문 앞에서 16년간 인쇄소를 운영했다는 D문화사 사장은 "내일 당장 그만둬도 이상할 게 없다"며 "학기 초에 그나마 학생들이 오는데 찾는 학생들이 갈수록 줄어들어 '이번에는 제본을 했었나' 가물거릴 정도"라고 말했다. 이 가게 주변에는 '침대 매트리스 방수커버' 광고지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이 사장은 "인쇄소 장사가 안 돼 방수커버 판매를 부업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최근 종이 대신 휴대폰과 태플릿PC 등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늘면서 인쇄소 영업은 더 어려워졌다. 경희대 앞에서 만난 대학생 김민규씨(21)는 "과제를 인쇄해 제출하라는 게 아니면 인쇄를 할 일이 없다"며 "수정도 편해서 필기 자체를 태블릿PC로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서울 한 대학의 사학과에 재학 중인 이모씨(23)는 "전공책이나 프린트물을 일일이 들고 다니지 않아도 돼 대학에 입학한 뒤로 거의 태블릿PC를 쓰고 있다"며 "필요한 책이 있으면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해 스캔한 뒤 학기 내내 태블릿PC로 봤다"고 말했다. 이어 "교재를 정가로 구매하는 게 맞긴 하지만 2만~3만원 하는 전공책이 한 학기 동안 한 챕터 정도 쓰이니 이 부분만 복사해서 쓰곤 한다"고 덧붙였다.

19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학내에서 30년째 복사실을 운영 중인 이모씨(59) 가게 앞에 주문 들어온 제본 목록이 적혀있다. 시험기간임에도 복사 의뢰가 단 2건에 불과했다. /사진=천현정 기자

교내 인쇄소도 사정이 어려워진 건 마찬가지다. 30년째 서울 성동구 한양대 학내에서 복사실을 운영 중인 이모씨(59)는 올해까지만 가게를 운영하고 학교 측에 계약 종료를 통보할 예정이다. 코로나19(COVID-19)와 세대 변화로 손님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임대료는 갈수록 늘면서다.

이씨는 "예전에는 교수님들이 전공책과 부교재 제본을 의뢰하면 학생들이 개강 전이나 시험기간에 복도를 꽉 채울 정도로 줄을 서서 교재를 구매해 가곤 했다"며 "지금 시험기간인데도 오늘 제본 의뢰가 단 2건이다. 원래는 제본 목록을 적는 칠판이 한바닥 가득 채워질 정도로 주문이 많았었다"고 말했다.

19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인문대 내 복사실. 의뢰가 들어온 강의 교재를 쌓아두는 책장이 비어있다. /사진=천현정 기자

1995년부터 한양대 인문대에서 복사실을 운영하는 장중영씨(67)는 학내 7~8개 복사실 상황이 다들 비슷하게 어렵다고 했다. 장씨는 "과제를 이메일, 학교 사이트 등에 온라인으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아져 요즘에는 결강사유서 같은 낱장을 인쇄하는 게 전부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정이 어려워진 탓에 수십년간 운영한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곳도 있다. 지난 7월 한양대 학생복지관 내 복사실을 인수한 공유덕씨(44)는 "전 사장님이 30년 정도 이 자리에서 복사실을 운영하다 매출이 급감해 가게 운영이 너무 힘들다며 인수할 사람을 찾더라"며 "거래처 사람이던 내가 인수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책을 통째로 제본해달라는 학생은 거의 없고 급하게 책 일부분을 복사해달라는 학생, 교재가 절판됐는데 도서관에서 빌릴 수가 없다는 대학원생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다"고 했다.

19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학생복지관 내 복사실이 텅 비어 있다. /사진=천현정 기자

대학가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교재 무단 복사 문제는 이전보다 더 심각해졌다. 과거 교재 한 권을 구해 주변인들끼리 제본해 나눠 가졌다면 최근에는 교재 내용이 담긴 디지털 파일을 모바일 커뮤니티 등에서 공유되고 있다. 인쇄소에 종이 자료 스캔을 의뢰해 디지털화하려는 이들도 늘었다.

공씨는 "교재를 스캔해 PDF 파일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많은데 받지 않고 있다"며 "무단 복사 문제도 있지만 학생 1명이 PDF 파일을 다른 학생들에게 팔거나 서로 공유하는 사례가 많다. 복사실 입장에서는 시장을 스스로 축소하는 격이라 되도록 PDF 제작은 안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성 기자 sorry@mt.co.kr 최지은 기자 choiji@mt.co.kr 천현정 기자 1000chyunj@mt.co.kr 이병권 기자 bk22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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