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이라는 미끼 [뉴스룸에서]

김광수 2023. 10. 20.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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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아들이 씩씩거리며 들어온다.

집 앞 건널목에는 앞장서 '민생'을 돌보겠다는 정당의 구호가 적힌 국회의원 현수막이 보란 듯이 걸렸다.

민생을 외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정치인들의 민생 행보와 민생 법안이 넘쳐나지만 정작 살 만해졌다는 안도의 한숨조차 듣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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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22일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과천분원에서 열린 장·차관 국정과제 워크숍을 주재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국민이 바라는 건 이념이 아니라 민생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서재훈 기자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씩씩거리며 들어온다. 양손에 보따리를 한가득 들고 있다. 학교에 갖다 놓은 소지품을 바리바리 싸왔다.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 멀쩡한 사물함을 왜 바꾸는지 도통 모르겠단다. “그 돈이면 맛없는 급식이나 제대로 만들지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고 투덜댄다. 집 앞 건널목에는 앞장서 ‘민생’을 돌보겠다는 정당의 구호가 적힌 국회의원 현수막이 보란 듯이 걸렸다. ‘OO중 사물함 교체 등 예산 8억 확보.’

민생을 외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어쨌든 숨통이 트이면 다행이다. 그런데 번지수를 잘못짚었다. 정치인들의 민생 행보와 민생 법안이 넘쳐나지만 정작 살 만해졌다는 안도의 한숨조차 듣기 어렵다. 한쪽에서는 대단한 성과인 양 떠들어도 공감 없는 그들만의 아우성에 그칠 뿐이다.

민생의 물줄기는 정부 예산에 담겼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말 시정연설에 나선다.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657조 원)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자리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의 보이콧으로 체면을 구겼는데 올해도 분위기는 썩 좋지 않다. 총리를 해임하고 대법원장을 다시 지명하라며 전례 없이 제동을 걸었다. 야당을 무시하고 연달아 장관 임명을 강행하는 사이 본회의장은 세를 결집하는 전장으로 변했다.

“국민이 바라는 건 이념이 아니라 민생이 최우선이다.” 언뜻 보면 야당의 쓴소리 같다. 낯설지만 윤 대통령 발언이다. 지난해 7월 장·차관 국정과제 워크숍에서 강조한 말이다. 새 정부가 의욕적으로 제시한 청사진을 꼼꼼히 체득하던 시기다. 어디까지나 초점은 민생이었다. 반국가세력 운운하는 서슬 퍼런 경고와는 거리가 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3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휑하게 비어 있는 더불어민주당 의원석 사이로 걸어 나가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헌정사상 최초로 시정연설을 보이콧하며 본회의장 밖에서 윤 대통령 규탄시위를 벌였다. 이한호 기자

이후 고작 1년 남짓 지났다. 민생을 갈망하던 초심이 흐릿해졌다. 생각이 다르면 손잡을 수 없다면서 좌우를 갈랐다. 간판으로 내건 민생은 뒷전으로 밀렸다. 걸핏하면 도탄에 빠졌다며 상대를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 반으로 쪼개진 지난 대선 구도가 하염없이 지속되고 있다. 혹여 정부 기조가 달라졌다면 국민 앞에 이해부터 구하는 게 도리다.

그럼에도 민생은 강력하다. 진영을 막론하고 거부할 수 없는 가치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치트키나 마찬가지다. 온갖 정책은 민생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오랜 단식을 끝내며 윤 대통령을 향해 승부수로 띄운 것도 민생 영수회담이었다. 민생을 기치로 절묘하게 옭아맬 뻔했다. 국민의힘은 떼쓰기라며 뿌리쳤지만 민생을 살리자는 취지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다시 민생 몰이가 시작됐다. "민생 현장으로 더 들어가서 챙겨야 한다. 나부터 파고들겠다." 윤 대통령이 뒤늦게 방향을 바꿨다. 이에 질세라 이 대표도 23일 당무 복귀를 선언하며 첫 행보로 민생을 내세웠다. 서로 민생 적임자를 자처하며 달려들고 있다. 살뜰하게 곳곳의 틈을 메워야 할 때다. 말로 현혹해 아등바등 상대를 밀쳐내고 표심을 노리는 뻔한 속내라면 곤란하다.

민생에는 정파가 없다. 그래서 여야 모두에게 기회다. 국회를 찾는 윤 대통령의 설득이 통할지, 나라 곳간의 허점을 파고들 야당 논리가 먹힐지에 달렸다. 이마저도 정쟁으로 얼룩진다면 치졸한 선전전과 다를 바 없다. 민생을 미끼로 던져 덥석 물기만을 바라는 격이다. 진정성 있는 경쟁을 기대한다. 반복되는 낚시질이 지겨울 때도 됐다.

김광수 정치부장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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