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산천을 누리는 노후...마당 있는 집에서 따로 또 같이 [집 공간 사람]
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집은 딱 주인을 닮는다. 건축이고 무엇이고 간에 모든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법이니까. 최재철(61) 차은경(59) 부부의 집도 그랬다. 은퇴한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경기 양평 전원 마을의 '인향재'(人香齋·대지면적 508㎡, 연면적 191.75㎡)는 구도랄 것도 디자인이랄 것도 없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산천을 빼닮아 조화로웠다. 부부가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고, 손주가 자유롭게 뛰놀고, 노모가 단잠을 즐기는 공간. 그렇게 각자의 생활에 몰입하다 언제라도 만족스레 어울릴 수 있는 집. 비범한 건축 철학이나 디자인을 따질 필요 없이 사는 사람의 생활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집에서 이름처럼 진한 사람 향기가 베어 나왔다.
부부의 주거 이력은 인향재 입주 전까지만해도 평범했다. 아이 키우는 맞벌이로 살면서 남들처럼 도시 아파트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노후에도 변함없을 것으로 믿었던 아파트 생활에 균열을 일으킨 건 아내 차씨였다. "막연히 땅이 있는 집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딸이 건축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언젠가 집을 지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은퇴를 앞둔 시점, 외손주가 태어나면서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더군요. 이왕이면 직접 터를 잡고 다음 세대에게 추억을 물려주고 싶다는 욕구가 컸지요."
먼 훗날로 미루기보다 손녀가 더 자라기 전, 흙을 만지며 뛰어놀 수 있는 전원주택을 짓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고,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딸네에서 한 시간이 넘지 않는 거리에 땅을 물색하다 지인의 소개로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은 전원주택 부지를 만났고, 딸의 오랜 친구이자 오후 건축사사무소 소장인 노서영 건축가와 파트너 김하아린 건축가가 설계를 맡으며 운명처럼 첫 삽을 떴다.
안팎이 자연, "지루할 틈이 없다"
두 소장이 이 집을 설계하면서 최우선으로 고려한 요소는 '자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찬찬히 볼수록 탄복이 나오는 풍경이다. 집 앞에는 저만치 떨어진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옆으론 양자산의 능선이 손에 잡힐 듯 아름답게 내려온다. 노 소장은 "자연과 동화되는 일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며 "동서 방향으로 형성된 자연축을 고려해 건물을 배치하고 여러 층위에 외부공간을 마련해 다양한 각도에서 풍경을 즐길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세 개의 마당이다. 입구에서 보이는 앞마당, 'ㄷ'자 건물의 가운데 위치한 안마당, 집의 후면에 자리한 뒷마당이 그것. 앞마당은 외부를 향해 열린 공간으로 집 전체에 탁 트인 공간감을 부여한다. 반면 안마당은 외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바깥 생활을 누리고자 했던 건축주의 요구를 반영했다. "모든 내부 공간이 마당과 연결되는데, 진입마당은 외부와 완충 역할을, 안마당은 바깥 풍경을 프라이빗하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탁 트인 창과 마당으로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이 연출되며 풍경이 일상에 녹아들었으면 했죠."
내부를 구성할 때는 박공지붕의 천장 높이를 달리해 다양한 공간감을 입혔다. 'ㄷ'자 배치에 따라 세 개의 지붕이 만들어졌는데, 지붕의 경사를 달리한 결과 공간마다 천장 높이가 다르다. 지붕이 완만한 안방과 서재는 지붕 경사를 그대로 드러내 낮은 층고의 답답함을 보완하고, 2층은 가파른 층고를 드러내는 식으로 개방감을 부여했다. 다이닝 공간의 지붕은 유일하게 길게 뻗은 처마를 만들었는데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의도다.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지 않고 최대한 자연에 가까이 가길 원했어요. 결과적으로 주변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이 됐죠."
자연과 맞닿은 공간을 향한 두 소장의 열의만큼이나 건축주의 만족도도 크다. 차씨는 "즐겨 보던 TV 드라마도 보지 않고 풍경을 보며 음악 듣고 차 마시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반복하는데도 지루할 틈이 없고 오히려 충전이 된다"며 "이 모든 게 어디서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덕분"이라고 했다.
따로 또 함께하는 생활
인향재에서 자연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사생활 보호였다. 현업에서 물러난 부부와 96세 노모가 종일 한 공간에 머무는 만큼 공간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손님과 거주자의 영역을 나누는 작업이 필수였다. '자연을 즐기면서도 사생활은 지키고 싶다'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건축주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건축가는 'ㄷ'자 형태로 건물을 배치했다.
집은 복도를 기점으로 오른편 다이닝 공간과 왼편의 거실 및 침실 공간으로 나뉜다. 가장 좋은 뷰를 점한 다이닝룸은 삼면이 오픈된 구조로 통창 너머 탁 트인 풍경과 마주한다. 온종일 햇살이 들어오는 곳으로 방문객이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자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이다. 현관에서 일자로 창을 배치한 복도를 지나면 거실과 게스트룸이 펼쳐지고, 가장 안쪽으로 화장실이 딸린 안방과 남편의 아지트인 서재가 나란히 자리한다. 테라스가 연결된 2층은 쉼을 테마로 독립적이면서도 담백하게 꾸몄다. 노 소장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마주하는 형태"라며 "시각적으로 연결되지만 물리적으로 구분해 실용적이고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
고령의 노모를 위한 공간도 눈에 띈다. 거실과 맞붙은 게스트룸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편안하게 이동하고 쉴 수 있도록 무릎 높이의 단을 만들고 한옥 분위기를 연출했다. 평소에는 개방해 트인 느낌을 살리고 필요에 따라 닫을 수 있도록 미닫이 문을 만들었다. 차씨는 "아파트에 살 때는 방에서 생활하셨는데 지금은 게스트룸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신다"며 "작은 면적이지만 개방감과 다양한 쓰임을 만들어주는 알토란 같은 공간"이라고 했다.
집으로부터 받은 선물
이사온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이 집이 평생 터전으로 느껴진다는 부부. 실향민 후손인 아내 차씨에겐 이 집은 생의 마지막 집이자 고향과도 같은 의미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곳이라기보다 가족이 공유하는 추억이 있고, 그것이 대를 이어가면서 남아 있는 실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속에 고향을 그리는 일이었을 터. "집에서 함께 추억을 만들고 집의 형태로 다음 세대에 대물림되면서 기억이 전해진다면 그곳이 고향이죠. 손주가 태어나면서 집짓기를 서두른 이유예요. 훗날 우리가 없더라도 유년기를 떠올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됐으면 해요."
고향을 꿈꾸며 머릿속에 담아온 구상이 오죽 많을까. 머릿속에 이미 즐거운 플랜이 한가득인 듯한 아내를 보며 남편 최씨가 말을 보탰다. 담담한 말의 행간에선 깊은 부부의 정이 읽혔다. "집을 지으면서 이 사람이 평생 큰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약속했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게 해주겠다고. 일단 아침에 자고 싶은 만큼 푹 잡니다. 아침 식사 준비가 요즘 저의 큰 기쁨이지요.(웃음)"
양평=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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