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의 지리각각] 팔레스타인, 유대인에겐 낙원 아랍인에겐 생존
팔레스타인 첫 거주민은 4천년전 유대인
1920년대 세계 각지로부터 유대인 유입
오슬로회담 '2국체제' 합의 휴지조각 돼
땅에 대한 의식이 유대인과 아랍인 차이
팔레스타인 비극의 근원에는 '땅'이 있다. 100년을 이어온 분쟁의 연료는 종교, 민족, 언어도 아니다. 땅이다. 사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은 같은 셈족에서 갈라져 나왔다. 언어도 같은 셈어족(Semites)에 속한다. 셈족은 고대로부터 유일신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유일신을 믿는 공통점도 있다. 심지어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종교적 공통 조상으로 삼고 있다. 사실 그들은 사촌형제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어떻게 유사 이래 보기 드문 극렬한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나. 답은 바로 땅에서 찾아야 한다.
◆4000년 전에서 2000년 전까진 유대인의 땅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과 사해를 잇는 계곡으로부터 서쪽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으로 원래 가나안으로 불렸다. 이 땅의 거주민들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4000년 전 성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그 내력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살다가 야훼(하나님)의 인도로 일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 지금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연고를 주장하는 단초다. 유대인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왕국을 세워 한때 번성했다. 그러나 BC 8세기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BC 6세기 유대왕국은 바빌론에 멸망했다. 유대인들은 한때 바빌론의 유수(幽囚)를 겪었으나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기원 후(AD) 70년경 헤롯 유다왕국이 로마에 복속되면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네트워크를 따라 세계 각지로 떠난다. 바로 디아스포라(diaspora)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일부 소수의 유대인들이 20세기 이스라엘 건국 때까지 남아 있었다.
◆이후 2000년간은 아랍인들의 땅
헤롯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으면서 유대인들이 급속히 세계로 퍼져나가자 그들의 빈 자리를 아랍인들이 채웠다. 이후 이 지역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됐다. 7세기까지 로마와 비잔틴 통치 하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 기독교인, 아랍인들이 공존했다.
7세기 들어 예언자 마호메트의 출현으로 이슬람교가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흥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이슬람교가 전역으로 확산됐고, 아랍 문화와 언어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세유럽의 십자군 전쟁 시기에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시도했으나 좌절됐다. 이후 13세기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들어서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과 비아랍 무슬림들이 다민족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대인의 경제적 지원을 노린 영국이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면서 이 땅은 다시 유대인에게 약속의 땅으로 다가왔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폭발했고 1920년부터 1940년대까지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로부터 땅을 대거 사들였다. 이로 인해 유대인과 아랍 공동체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긴장은 1927년 아랍인들이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해 수십 명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터졌다.
◆똑같이 땅에 애착하지만, 표현 방식은 달랐다
유대인과 아랍인 공동체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1947년 유엔은 총회를 열어 이 지역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유대인은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부했다. 아랍인들이 거부한 이유는 점유하고 있던 땅의 면적에서 아랍인이 10배 이상 많았는데, 분할 방식은 거의 반반씩이었기 때문이다. 인구도 아랍인이 3배 많았다.
하지만 유대인은 유엔 결정을 근거로 이듬해 1948년 5월 14일 자정을 기해 건국을 선언했다. 미국은 20분도 안 돼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한 첫 국가가 됐다. 그러자 이웃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은 곧바로 전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이 1차 전쟁 이후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촉발된 이번 분쟁까지 모두 다섯 번의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유대 시오니즘에 따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면서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양측 간 땅에 대한 연고의 주장에서 어느 쪽이 더 정당하냐는 판단은 쉽지 않다. 맨 처음 기원을 따지면 유대인, 현재 점유를 기준으로 하면 아랍인이 유리하다.
결국 지금 형세는 누가 더 땅을 지킬 힘이 있느냐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양측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팔레스타인 땅은 솔직히 척박하기 그지없는 지역이다. 경작은 고사하고 절반 이상이 사막이고 사막이 아닌 지역은 연간 강수량이 250mm도 내리지 않는 반 건조 사막지역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해 경작을 할 수 없다.
땅을 놓고 목숨 건 전쟁을 벌이지만 유대인과 아랍인은 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유대인은 우리나라 두레와 비슷한 '키부츠'라는 공동노동조직체를 만들어 사막을 개발했다. 한 사람 한 가족이 할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사막을 관개해 식생이 우거진 옥토로 바꾸었다. 아랍인들은 그런 생각을 못했다. 힘을 합쳐 자연을 극복할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목축과 소규모 개인농 형태를 띠었다.
유대인은 사막이나 다음 없는 메마른 땅을 팜 나무와 시냇물이 흐르는 낙원으로 만들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연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 지난 100년간 양측의 땅을 대하는 자세가 천양지차였기에 아랍인들의 거주지역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유대인들의 정착촌은 갈수록 확대됐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에 대한 식탐은 그칠 줄 모른다. 1993년 오슬로회담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두 국가 체제'로 가자고 합의를 해놓고 이를 준수하지 않는 쪽은 이스라엘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자치를 합의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2년 후 1995년 극우 시오니스트에게 피살됐다. 이후 1996년 극우 시오니스트 베냐민 네타냐후가 정권을 잡은 후 지금까지 이스라엘 정국을 주도하며 정착촌 확대정책을 펴고 있다.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최근 건설되는 정착촌의 집들은 그림 같다. 반면 그 이웃의 아랍인들의 거주지는 추레하다. 물론 경제력의 차이 때문이지만, 땅에 대한 개발의 집념 차이가 근본 원인이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을 구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만드는데 진심이다. 그들에게 지리·지형·기후는 장애물이 아니다. 반면 팔레스타인에서 2000년을 살아온 아랍인들은 조건에 순응적이다.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너무나 불균형한 힘의 행사는 이러한 땅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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