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종길 서울대 교수 50주기...‘中情 출신’ 동생이 추모한 형의 마지막 길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10.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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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선(왼쪽)씨가 19일 오후 옛 남산 중앙정보부 청사(현 서울유스호스텔)앞에서 50년 전 형 최종길 서울대법대 교수와 함께 정보부 청사로 들어가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 교수는 정보부에 간지 사흘만에 숨졌다. /남강호 기자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형(兄)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와 함께 걸은 50년 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19일 오후 2시 30분, 서울 명동 인근 옛 아스토리아 호텔(현 디어스명동) 앞. 최종선(76)씨가 앞장서고 최종길 교수의 아들인 조카 최광준(59) 경희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뒤따랐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장영달 전 의원 등 최 교수의 마지막 길을 따라 걸으려는 추모객들이 뒤를 따랐다. 목적지는 남산 서울유스호스텔. 옛 중앙정보부 청사가 있던 곳이다.

1973년 10월 16일 오후 최종선씨는 아스토리아 호텔 지하 커피숍에서 형을 만났다. 그는 한 해 전인 1972년 중앙정보부에 수석으로 합격한 감찰실 신입 요원이었다. 옆 부서에서 “형님께 잠깐 여쭤볼 일이 있으니 모시고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최종선씨는 형을 정보부 남산 청사 입구까지 안내했다.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 구경 한다고 생각하시고 한번 봐두십시오.” 최 교수는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가 보고…”하며 웃었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일행은 옛 정보부 청사 건물이 보이는 빈터에 멈췄다. 최종선씨가 말했다. “여기에 초소가 있었어요. 전 다른 건물에서 일했기 때문에 담당직원에게 형님을 보내고 돌아섰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 출입자 통제소를 확인해 보니 형님의 주민등록증이 그대로 있는 거에요. 무슨 일이 생겼나 불안해졌습니다.”

고 최종길 서울대법대 교수

최 교수는 사흘 뒤인 10월 19일 새벽 이 건물에서 숨졌다. 마흔둘 한창 나이였다. 정보부는 며칠 뒤 최 교수가 ‘유럽 간첩단’ 일원임을 자백하고 화장실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정보부의 공식 발표를 듣다가 기절했다고 가장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러고는 고문, 타살 의혹을 낱낱이 기록한 ‘양심 수기’를 정리하며 훗날을 기약했다.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 교수가 고문을 받고 숨졌거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내던져지는 방법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다.

최종선씨는 “형님은 우상 같은 존재”라고 했다. 열여섯 살 터울도 났지만 모든 면에서 뛰어난 형이었다. 독일 쾰른대에서 법학박사를 마치고 1964년부터 서울대 법대 교수로 민법을 가르쳤다. 최종고 서울대 명예교수는 ‘잡문을 거의 쓰지 않고 법학 논문만 50편 가까이 발표한 선구적인 민법학자’(‘한국의 법학자’)로 평가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을 맡아 시국사건으로 단식 농성하던 학생들을 해산시키며 함께 눈물 흘리던 스승이기도 했다.

1972년 유럽 여행중 로마 트레비 분수앞에서 기념촬영한 최종길 교수 가족. 오른쪽 부터 최교수, 부인 백경자씨(2015년 작고), 딸 희정씨, 아들 최광준 교수/조선일보 DB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최종선씨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서 정보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나중에 형에게 “혼났다”고 했다. 형의 죽음은 최종선씨의 인생을 뒤바꿨다. 예수를 팔아먹은 가롯 유다처럼 형을 정보부에 넘겨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형이 사망하고도 7년 넘게 중앙정보부에 몸담았다. “형의 죽음을 밝히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이라고 했다. 그가 쓴 수기는 1988년 천주교 계열 평화신문에 전문이 공개됐다. 이 신문 간부였던 김정남(김영삼 정부 교육문화수석)씨를 통해서였다. 2002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1981년 중앙정보부를 퇴직하고 기업을 운영하다 1994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교수는 198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가 다닌 쾰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전공도 같은 민법이다. 1999년 경희대 교수로 부임했다. 아버지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을 위해 진실화해위원회 비상임위원도 맡았다. 그는 “50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아버지의 사인을 정확히 밝히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대 근대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 1층 강의실에선 최종길 교수 50주기 추모학술회의 ‘국가폭력과 인권침해’가 열렸다. ‘최종길홀’이라는 명패가 붙은 강의실이었다. 의문사위(委) 결정이 나온 이듬해인 2003년, 안경환 당시 서울법대 학장이 주도해 최 교수를 기리기 위해 명명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선 김종보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과 안경환 전 서울법대 학장, 김정남 수석 등이 추도사를 맡았다.

19일 형과의 마지막 동행길을 되밟은 최종선씨가 말했다. “형님이 고문당해 죽은 옛 정보부 청사에 그 사실을 알리는 기념물 하나 없는 게 안타깝다.” 그는 “대한민국이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계속 전진해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이런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이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최종선씨(왼쪽)가 故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가운데)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함께 명동 근처 옛 아스토리아 호텔(현 디어스명동)앞에서 남산 중앙정보부 청사(현 서울유스호스텔)로 안내해 올라갔던 길을 다시 돌아보고 있다.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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