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금쪽이와 우호적인 무관심
과도한 공감과 위로 보단 우호적 무관심 필요한 때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부산시교육청에서 요청한 강의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 선생님,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기’가 주제인데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언제나 특별하다. 진심으로 선생님을 존경하는데, 오른팔의 화상 흉터로 한 여름에도 긴 팔을 입던 내게 아름다운 무늬라 말해준 최초의 어른이 중1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수난 시대다. 2021년 경기 의정부시 호원초등학교의 교사 2인이 6개월 간격으로 사망했고 서울 서이초등학교의 교사가 올해 7월에 사망했다. 엉뚱하게도 ‘금쪽같은 내 새끼’의 육아 멘토에 비난이 쏟아졌다. 물론 육아 코칭의 일부 문제점에 공감하지만, 나는 그게 전적으로 프로그램이나 멘토 탓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젖을 원하는 요구에 먼저 젖을 준 거다. 그게 요즘 트렌드고 옳은 일이라 여긴 신념일 수도 있다. 부모의 요구에 민감하게 부응한 대가로 이익을 얻는 게 잘못은 아닐 거다. 다만 극심한 배고픔도 아닌데 계속해서 젖을 주는 게 옳은 방향일까?
아이들에게 젖을 떼게 하는 것, 원하는 걸 하되 책임지게 하는 것. 그런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내 아이를 금쪽이라 명명하고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순간 다른 아이들은 뭐가 되는가? 모든 아이가 금쪽이라면 그런 아이들의 세계는 과연 아름다울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도,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시키는 대리인도 아니다. 내 아이의 마음을 세심하게 읽어달라는 요구는 종종 악성 민원으로 둔갑한다. 거기엔 ‘내 새끼 건드리면 내가 가만히 안 있어’의 비뚤어진 심리적 동일시가 내재되어 있다.
공감이 과잉인 시대, 누구나 위로받기를 원하고 위로가 넘치지만 정작 위로받기 드문 시대에 살고 있다. 공감은 한없이 상대의 마음이 되는, 하나를 지향하는 게 아니다. 진짜 공감은 상대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비슷한 성향이나 취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친밀함이 싹튼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이 말한 섬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의 간극이 아닐까. 사랑의 목적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그건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은 하나의 무대에서 두 사람이 펼치는 공연 같은 거, 상대를 희생하거나 훼손하지 않으며 둘이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 가는 무대다. 선생님이 가족이나 친구 같다면 좋은 선생님일까? 모두가 친구 같은 선생님을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가까운 거리는 차이를 뭉개고 상대를 파괴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내 마음일 뿐이라는 것, 내 마음이 상대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 내 마음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우호적인 무관심이 친밀함보다 더 나은 거리일 수 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을 보면서 나는, 선생님과 학생의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길, 그 거리를 존중하길 바란다. 선생님이 학생이나 학부모와 조금은 어려운 관계였으면 한다.
한없이 온화해 보이는 위로와 공감이 가진 은폐, 그 기만적인 의도를 애써 모른 척해야 할까. 공감과 위로가 모두의 선인 것처럼 사람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지만, 과연 사람들은 만족하고 서로 친밀한가. 숨진 호원초 교사는 장기 결석하는 아이의 학부모와 수많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400건의 문자를 주고받는 관계는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이거나 악성 민원의 갑질 관계밖에 없다. 내 아이에 대한 공감의 요구는 곧잘 악성 민원과 갑질로 돌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아이는, 나와 심리적으로 동일시하는 금쪽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여러 학부모의 민원에 치였을 것이다. 그 중 페트병에 손을 다친 사고는 아이의 부주의일 뿐이다. 그 일로 교사는 군 복무 전에도, 군 복무 휴가 중에도, 전역한 뒤에도 학부모의 연락을 받고 만나야 했다. 유럽에선 설사 손을 베더라도 어릴 때부터 칼을 쓰는 교육을 시킨다. 아이들이 칼로 식재료를 자르고 요리를 한다. 주의를 기울이며 위험을 통제하는 법과 실수로 인한 상처의 책임까지 배우는 것이다. 나는 평소 감정 노동자에게, 악성 민원은 협박범의 심리와 같아서 원칙대로 대응하라고 조언하지만 서울시교육청이 배포한 ‘악성민원 대응 매뉴얼’을 보고 좌절했다. ‘학부모가 행패를 부리면 차를 권하라’.
공감이 오남용 되고 공감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이 다양화된 오늘날,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점차 충동적으로,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아이에게 좀 더 공감해 달라 요구하지만, 공감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는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는 과정이다. 공감은 가까운 동시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금쪽이에게 우호적인 무관심의 거리가 어떨까. 내 아이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 공동체의 평범한 일원일 뿐이라는 것, 젖을 떼는 것, 우리는 차이라는 것, 책임지는 것, 갈등을 견디고 이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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