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런던 찍고 서울… 20년 만에 한국 ‘지각 데뷔’한 월드 클래스 테너
19일 세종문화회관 연습실. 소프라노 서선영 교수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를 열창하고 있었다. 오페라 1막에서 시녀 ‘류’가 부르는 애절한 아리아 ‘들어보세요 왕자님’이었다. 잠시 후 두 남자 성악가가 서 교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티무르왕 역을 맡은 베이스 양희준 교수(이상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왕의 아들 칼라프 왕자 역의 테너 이용훈 전 서울대 교수였다. 푸치니 특유의 낭만적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이용훈과 서선영 교수는 손을 맞잡았다. 연습실엔 피아노 한 대뿐이었지만, 오페라 무대가 펼쳐지는 듯했다.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가 26~29일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이번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메트)과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칼라프 역을 맡았던 이용훈 교수의 첫 한국 오페라 무대라는 점이다. 세계 굴지의 명문 극장에서 이 역만 110여 차례 가까이 맡았던 정상급 테너가 정작 한국에서 ‘지각 데뷔’를 하는 셈이다. 칼라프 역은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의 ‘스리 테너’가 즐겨 불렀던 아리아 ‘누구도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로도 유명하다. 이 교수는 “프로 성악가로 20년쯤 활동하다가 드디어 기적처럼 한국 데뷔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지각 데뷔’는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공연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한국 음악계의 근시안적 풍토와도 연관 있다. 그는 이날 간담회에서 “외국에서는 3~5년 전부터 미리 제안을 하고 계획을 잡는 반면,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1년 전에 연락하거나 급할 때는 ‘다음 달 공연이 있다’고 연락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행히 이번에는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내년 8월 예술의전당에서도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에 출연 예정이라는 점은 분명 희소식이다. 그는 2014년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될 때에도, 사임할 때에도 화제를 모았다. 이 교수는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교육과) 무대 경험의 조율이 어려웠다. 아직은 더 공부하고 배워서 성숙해진 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누는 편이 맞겠다 싶었다”고 했다.
이번 ‘투란도트’는 연극 연출가 손진책(76)의 첫 오페라 연출작이기도 하다. 그는 “오페라와 연극은 모두 관객과의 소통이 본질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오페라는 음악이 먼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장르가 낯설진 않지만 (오페라를)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연극과 마당놀이로 잔뼈가 굵은 이 노장은 오페라 연출에 대한 욕심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시녀 류의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죽음의 도시’가 ‘삶의 도시’로 바뀌고 온 나라의 민중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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