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7. 삼악산: 청춘으로의 비상

장보영 2023. 10. 2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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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떠오른 소회 ‘청춘아 고생했어’
용화·청운·등선봉 3개 바위 삼악산 명칭
잔잔한 춘천, 이상·현실 고민 청춘 상기
가파른 바위 등반 의암호 푸른 자태 조망
붕어섬·송암스포츠타운·춘천대교 한눈
기쁨 만끽 청년 외침 “오늘 하루 다 살았어”
유독 마음에 남아 소박한 응원 건네
삼악산 등선봉. 춘천 서쪽의 산을 볼 수 있다.

귀환(歸還). 당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나요? 사는 일이 막막할 때, 멈춰서 쉬고 싶을 때, 누군가가 막연히 그리울 때 불현듯 떠오르는 어떤 곳 말입니다. 그곳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될 수도, 가족이나 오랜 친구가 지내는 곳이 될 수도, 각별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생애 처음 도착한 먼 이국이 고향보다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리운 곳, 돌아갈 곳,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팍팍했던 삶은 잠시 살만해집니다.

저에게 춘천(春川)은 그런 곳입니다. ‘봄의 시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이제 부르기만 해도 아득해집니다. 그곳에 닿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아려야 할까요? 세월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3년, 스무 살이 된 저는 문학도로서 청운의 꿈을 안고 춘천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습니다. 익숙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꾸리는 생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었습니다. 동기들과 몰래 낮술을 걸치고 수업을 듣기도 했고 엉뚱한 호기심이 동해 난데없이 클래식기타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한 달 만에 탈퇴한 기억도 납니다.

삼악산 주봉인 해발 654m의 용화봉.

그리고 수많은 계절이 흘러 2023년 10월, 저는 춘천의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용화산, 봉화산, 금병산, 북배산, 구봉산 등 춘천을 에워싼 여러 산 중 삼악산을 찾았습니다. 춘천시 서면 덕두원리에 솟은 산. 해발 654m의 주봉 용화봉을 비롯해 청운봉, 등선봉 세 개의 바위에 연유해 삼악산(三岳山)이라고 부르는 산. 산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만이라 고민하지 않고 다시 삼악산을 택했습니다. 2016년 3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길목에 친구들과 처음 삼악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은 늘 가까우면서 멀었습니다. 지금 사는 원주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데도 막상 가기까지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는 게 바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엄두가 잘 안 났습니다. 무언가를 돌아보고 추억하는 데에는 일상의 에너지 이상이 필요했는데 앞만 보고 휩쓸리며 살아가다 보면 먹고 살아가는 일 외의 다른 무언가를 할 만한 여유가 사라지기 마련이라서요. 춘천으로 향하는 것은 장소를 떠나 20년이 훌쩍 넘은 추억의 상자를 여는 일이었습니다.

삼악산 정상 가는 길에 바라본 춘천 풍경. 의암호와 붕어섬이 조화를 이루는 이 장면은 춘천이 가진 하나의 상징이다.

아침 10시, 춘천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의암매표소 방향으로 이동하는 7번 버스를 탑니다. 의암호를 끼고 달려가는 버스에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어느덧 가을입니다. 언제 가을이 이토록 가까이 내려온 것일까요? 시간이 멈춘 듯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계절 속으로 오래전 MP3 플레이어로 자주 들었던 노래 한 곡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가수 뜨거운 감자가 2003년 여름 발표한 ‘아이러니’라는 노래입니다. 사람을 알아가고~ 계절을 알게 되고~ 현실에 아파하다~ 옛꿈을 떠올리고~ 10㎝씩 멀어져가다 가끔씩은 잡힐 것 같고~”

가사의 내용처럼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인 생각’ 앞에서, ‘열일곱과 서른둘이 뭐가 달라졌냐’는 질문 앞에서 새삼 나의 지난 꿈을 돌아봅니다. ‘10cm씩 멀어져가다 가끔씩은 잡힐 것 같은’ 꿈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다만 그 시절의 꿈과 지금의 꿈은 어딘지 달라진 데가 있습니다. 그때 그토록 간절했던 일들이 지금은 어쩐지 조금 부질없고 쑥스럽게 느껴진달까요? 그토록 바라던 일 없이도 살만해지기까지, 그때와는 다른 꿈을 꾸기까지 그사이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해봅니다.

신연교를 지나며 의암호 반대편으로 건너옵니다. 의암댐 정류장에서 하차 후 의암매표소까지 천천히 이동합니다. 걸어가는 길 위로 자전거 라이더들이 무리 지어 달려갑니다. 저들은 아마 오늘 새벽 서울에서 출발해 점심으로 춘천 닭갈비를 먹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상경할 것입니다. 경춘국도 라이딩은 자전거 동호인들의 오래된 취미입니다. 어딘지 세련된 멋을 풍기며 바람처럼 질주하는 라이더들이 남기고 간 바람 속을 홀로 걷습니다. 10월 말이면 건각의 러너들이 이 일대를 바람처럼 질주하는 춘천 마라톤이 열립니다.

10월 3일, 개천절이라 의암매표소는 휴무입니다. 입장료 2천 원을 벌었습니다. 매표소 앞 공터에서 간단히 채비하고 11시쯤 산행을 시작합니다. 계단을 치고 500m쯤 산길을 걷자 상원사에 도착합니다. 무릇 7년 전 3월의 산행을 소환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미리 맞으러 삼악산을 찾았으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얼어붙은 칼바위였지요. 등산로에 고정된 밧줄을 붙잡고 아찔한 산길을 오르는 내내 식은땀을 흘렸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등선봉 능선 위에서 바라본 강촌3리 풍경. 

그때 그 길을 다시 오릅니다. 여전히 코가 닿을 듯 가파른 바위 구간을 얼마간 쉬지 않고 오르니 기다렸던 의암호가 등 뒤에서 푸른 자태를 드러냅니다. 어쩌면 삼악산은 바로 이 풍경을 보기 위해 구태여 오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암호 한가운데 떠 있는 붕어섬과 그 너머 하중도와 상중도, 인근의 춘천송암스포츠타운과 저 멀리 춘천대교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폭의 그림처럼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2년 전쯤 생긴 춘천 삼악산 호수 케이블카도 여기 서니 아주 잘 보입니다.

오늘 하늘에는 오전부터 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어젯밤까지도 이다음 화창한 날을 기다려 삼악산에 오르는 게 좋을지 조금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강행한 까닭은 춘천은 묘하게도 이런 날씨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수업 중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으면서 소설 속 안개의 도시 무진(霧津)과 이곳 춘천이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서울과 무진 사이에서 가야 할 바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지요. 그것은 현실과 이상의 다른 이름이었지요.

우리의 젊음도 그러했습니다. 분지의 안개 속을 서성이며 언제쯤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흐린 날이 가고 나에게도 빛이 올까 연민했던 지난 시간. 성인이 되어 새 시대가 눈앞에 열렸고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재미있었고 신기했지만 머지않아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과 결핍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지난 시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바깥을 헤맸던 지난 시간.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춘천의 갑갑한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나 자신의 또 다른 희망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산에 오른 지 1시간 정도 지나 전망대가 나타납니다. 어느덧 정오라 먼저 오른 이들 몇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그때 20대로 보이는 한 청년이 멋진 조망을 바라보며 일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 오늘 하루 다 살았어. 오늘은 그만 살아도 돼!” 후회 없는 말,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 말이 유독 귓가에 크게 울립니다.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고, 희망은 지금 이 안에 있다고, 들리지 않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전망대를 벗어난 지 5분 후 용화봉에 이릅니다. 이 산의 엄연한 정상이지만 산길에서 살짝 빗겨나 있기에 정신없이 앞만 보고 지나가면 놓치기 쉽습니다. 정상을 알아본 이들은 멈춰서서 인증 사진을 찍습니다. 저도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정상의 순간을 즐깁니다.

용화봉에서 길은 갈라집니다. 한 곳은 멋진 기암절벽을 자랑하는 등선폭포 가는 길, 한 곳은 청운봉과 등선봉을 경유해 강촌으로 내려가는 종주길. 7년 전 등선폭포로 향했으니 이번에는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섭니다. 능선 위로 희미한 햇살 한 줄기를 본 것 같습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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