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로봇이 건넨 작은 화분…‘사람’을 깨우다[전문가의 세계 - 박승일의 영화X기술]

기자 2023. 10. 19.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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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WALL · E
인간의 탐욕이 부른 지구의 종말
쓰레기로 가득 찬 황폐한 땅에서
청소 임무를 맡은 월-E
그것이 아닌 ‘그’는 유일한 창조자
애니메이션 <월-E>의 한 장면. 지구에 홀로 남은 청소 로봇 월-E(왼쪽)는 우주선 액시엄호에서 파견된 생명 탐지 로봇 이브를 만난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미래의 언젠가 우리는 아마도 인간 너머의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600만불의 사나이’나 ‘로보캅’이 그런 것처럼, 아니면 <매트릭스>의 네오나 아이언맨이 그런 것처럼, 근육과 힘을 강화할 수도, 두뇌와 지능을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질병과 노화, 죽음이라는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기술 발전이라는 구세주를 만나 마침내 인간 개조의 쾌거를 이룰지도 모른다. 먼 미래까지 갈 것도 없다. 스마트폰과 접속한 인간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었고 이제 다시 인공지능과의 접속을 통해 인간 지능의 한계마저 뛰어넘으려 한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미 인간은 언제나 인간-기계의 접속인 셈이다.

물론 이렇게 화려한 미래가 전부는 아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와는 또 다른 인간 종의 모습을 그려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기계화’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현실적인 미래상으로서의 ‘인간의 동물화’가 바로 그것이다. 넘치는 풍요 속에서 그저 먹고 자고 싸는 존재로만 남게 된 인간의 모습, 역사도 목적도 이념도 없이 하루하루를 오로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적인 삶의 모습, 인간 초월의 낙관적 서사를 한순간 무너뜨리는 이 인간 잉여의 모습이 우리의 또 다른 미래상인 것은 아닐까? 영화 <월-E>는 진지하지만 유쾌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인가, 지구의 종말인가

지구는 오염되고 병들었다. 오염물질로 가득 찬 대기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누렇고 탁하다. 강과 바다에는 더 이상 생명이 약동하지 않고 땅과 하늘에도 살아 있는 것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한복판에도 시시때때로 모래 폭풍이 들이닥치는 상황이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문명의 잔해, 쓰레기뿐이다. 그런데 가만, 저 쓰레기 사이를 경쾌한 음악 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작은 로봇이 있다. 그는(나는 일부러 이 로봇을 ‘그’로 칭했다) 쓰레기 처리 임무를 수행하는 청소 로봇, ‘월-E’이다. 그는 왜 혼자 남게 되었을까? 지구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모든 게 사라져버린 뒤에도 여전히 도처에서 반짝이는 홀로그램 광고는 지구의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은 자본주의의 망령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의 무한 확장이 지구의 종말을 초래했음을 은유하는 것일까? 이 종말의 세계 위에서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정은 이렇다. 미래의 자본주의는 기술 발전과 함께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로움을 이룩하지만, 동시에 풍요가 계속될수록 상품의 집적에 정확히 비례하는 만큼의 쓰레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결국 지구 전체가 쓰레기로 뒤덮여 더 이상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되자,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기도 한 대기업 BnL사는 그 해결책으로 최고급 유람선 액시엄호에 인류를 태워 우주로 보내는 대규모 이주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풍요로움을 포기하기보다는 지구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BnL사는 인류가 우주선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는 동안 수만 대의 쓰레기 청소 로봇 월-E를 통해 지구의 각종 쓰레기를 처리하고, 청소가 완료되면 다시 지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청소가 진행되면서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되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지구에 주기적으로 생명 탐지 로봇을 보내는 것도 계획의 일환이었다. 물론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거라면 애초에 지구가 종말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구 청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인류가 지구를 떠난 지도 어언 700년이 지났다.

종말의 세계, 그러나 여전한 세계

생명 탐지 로봇 이브를 본 순간
우연의 마주침이 일으킨 연쇄작용
돼지처럼 살던 우주선의 인간들을
다시 사람으로 지구로 돌이킨다

홀로 남은 주인공 월-E는 700년째 지구를 청소 중이다. 그는 정직하게 노동한다. 자신의 몸 안으로 쓰레기를 밀어 넣고 강한 압력으로 압축해서 정육면체 모양의 블록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걸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거대한 빌딩을 만든다. 도시를 가득 메운 쓰레기 빌딩의 저 웅장한 스카이라인은 그 노동의 결실이자 작품이다. 쓰레기를 치우라는 프로그래밍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치울지는 순전히 그의 의지고 자유다. 그는 노동하는 사이사이에 예쁘고 신기한 유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데, 이 또한 그가 단순히 명령 수행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지와 자발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노동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임금 노동도 아니고, 같은 일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시시포스의 노동도 아니다. 비록 매일 쓰레기를 치울 뿐이지만, 그는 모든 게 무너진 세계 위에 다시 그만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유일한 조물주이며, 그렇기에 그의 노동 역시 그만의 독특성과 탁월성을 보여주는 세계 창조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지난 700년 동안 그는 그렇게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액시엄호가 파견한 생명 탐지 로봇 ‘이브’가 다가온다. 다시 말하자. 그는 우연히 이브를 마주친다. 700년 동안의 외로움, 그 끝에서였다.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도통 그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직 지구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에 분주할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무시무시한 플라스마 캐넌을 장착하고 있기까지 하다. 완벽히 다른 자아, 다른 세계가 이렇게 충돌한다. 그러나 그는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의 세계로 조심스럽게 초대한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지금까지 모은 온갖 신기한 것들을 이것저것 꺼내보이면서 환심을 산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작은 새싹 화분을 건넨다. 얼마 전 그가 폐허 속에서 발견한 최초의 생명이었다. 그 순간 생명 탐지라는 이브의 목적함수가 발동되고 그녀는 이 식물을 몸 안에 봉인한 채 깊은 잠에 빠진다. 얼마 뒤 다시 액시엄호가 그녀를 데리러 지구에 오고, 월-E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우주 너머로 모험을 떠난다.

인간의 동물화, 노동과 타자가 사라진 세계

월-E가 도착한 우주선 내부, 영화의 분위기는 여기서 반전된다. 황폐하고 메마른 지구의 풍경 대신 아마도 종말 전의 지구가 꼭 그랬을 듯한 자본주의 소비 천국의 모습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모두가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공중부양 의자에 앉아 눈앞에 놓인 단말기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어쩐지 모두가 고도비만 체형이다. 이들이 끊임없이 먹고 있는 음식도 전부 소화가 쉬운 음료 형태의 패스트푸드이다. 이들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공중부양 의자에 앉아 우주선 내부의 상점과 편의시설을 유랑하면서 그저 먹고 소비하고 떠들어댈 뿐이다.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반쯤 누워서 이 소비 회로를 끝없이 돌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옆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다. 이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단말기 영상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눌 뿐, 실재하는 타자 그 자체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오직 디지털화된 이미지 기호로서만 서로를 대하며, 그렇기에 이들의 세계는 우주를 떠도는 우주선만큼이나 현실 위에서 가벼이 부유한다.

어찌 된 일일까? 아마도 이런 연유일 터이다. 첨단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만들었다. 각종 로봇이 상품 생산에서부터 교육과 청소, 미용, 심지어 칫솔질까지도 대신해주니, 한편으로 인간은 이 모든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도 자유를 얻게 되었다. 진보였지만 또한 퇴보였다. 로봇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그리하여 인간은 마치 사육되는 동물처럼 오로지 욕구로만 가득 찬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동화된 시스템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먹고 자고 싸는 모든 게 해결되니 굳이 땀을 흘려 노동할 필요도, 힘을 들여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도 없어졌다. 우주선의 낮은 중력 탓에 골격이 약해진 데다 로봇의 도움으로 운동량마저 줄어든 까닭에 점차 비만 체형으로 변해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노동 시간이 없어진 만큼 자유 시간이 늘어났지만, 그 시간은 단지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디지털 이미지를 좇는 것으로 채워질 뿐이었다.

기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는, 달리 말하면 우연이 제거된 세계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이 내일과 같을 때,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그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 여기에는 변화가 없으며, 그렇기에 역사가 없다. 이미 유토피아에 도달했으니 나아갈 방향으로서의 이념 또한 사라지고 만다. 기술 발전은 분명 지구의 종말로부터 인류를 구원했지만, 그렇게 해서 마주한 세계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존재할 수 없는 배부른 돼지만의 세계였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타자의 존재 또한 무의미해진다. 타자란 나와는 다른 미지의 존재이자 결코 움켜쥘 수 없는 낯섦일 텐데, 알고리즘에 따라 익숙한 것만을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나와 다른 타자와의 우연적인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타자가 사라진 세계, 이 세계는 권태롭다 못해 절망적이다.

마주침의 우연성, 세계는 그렇게 변화하고

이렇게 꽉 막힌 세계에 월-E가 도착한다. 우연이다. 그가 새싹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고(물론 700년 동안의 청소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우연이며, 그녀를 따라 액시엄호에 오게 된 것도 전적으로 우연이다. 우연은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 그가 이브를 따라가다 마주친 남자 존은 월-E로 인해 정해진 선로에서 생애 최초로 벗어나게 된다. 필연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이어서 월-E는 이브에게 다가가기 위해 메리라는 여자에게 말을 걸고, 그녀 역시 처음으로 단말기 화면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그녀는 말한다. “수영장이 여기에 있는 줄 몰랐네!” 월-E라는 우연성의 요소는 우주선 전체를 우연과의 마주침으로 강하게 휘감는다. 그의 손을 잡은 우주선 선장 매크리는 처음으로 흙이라는 물질을 보게 된다. 이게 뭐냐고 인공지능에게 묻자 인공지능 컴퓨터는 그에게 땅(earth)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지구(Earth)라는 까마득하게 잊힌 세계가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질문이자 가능성으로 떠오른다. 그는 재차 묻는다. 그럼 바다는? 댄스는? 그에게 드디어 욕구가 아닌 욕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우연의 연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고장 또는 불량 판정을 받은 로봇들은 이 세계의 자동성과 필연성을 저해하는 위험 요소이다. 로봇의 돌발적인 행동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탓이다. 한데 월-E와의 마주침은 이들 고장난 로봇들로 하여금 자신을 고장으로 판정한 기존 질서에 함께 맞서게 만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지구로의 귀환을 결정한 선장과 이를 막으려는 인공지능 간의 한판 승부는 지금까지 공중부양 의자에 누워만 있던 대다수 승객들을 일으켜세우는 계기가 된다. 이 또한 우연이다. 이들은 떨리는 다리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손을 잡아 서로를 구한다. 연대와 협력, 또는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는 않더라도 다분히 인간적인 손 내밂과 손 잡음이 돌연 이들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인간이게 만든다. 인간은 언제 동물이 되고, 언제 인간이 되는가. 영화는 우리에게 줄곧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월-E의 희생. 아마도 예수였던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했던 이가. 내가 월-E를 ‘그것’이 아닌 ‘그’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영화는 끝나도 현실은 계속된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배부른 동물로 남을 것인가
배고픈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액시엄호는 마침내 지구에 도착한다. 당장의 안락함과 욕구에 만족하기보다는 비록 황폐한 땅일지언정 이 지구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들어나가겠다는 단호한 결심이다. 배부른 동물로 남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겠다는 선언이자 그에 대한 욕망이다.

노동하고 사랑하던 월-E의 모습은 이제 인간들을 통해 반복된다. 단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린다. 옥수수가 자라고 포도가 열리더니 강과 바다에 물고기가 돌아온다. 건물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일구어낸다. 아마도 이 문명은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인류(인간 존재)의 역사와 목적, 이념이 새롭게 출발한다. 월-E와 이브라는 로봇(비인간 존재)도 함께 말이다.

아, 그런데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저 우주선에서의 무한정한 소비 생활, 그러니까 끊임없이 먹고 마시면서 온라인 세계에만 빠져 있는 인간의 모습이란 결국 지금 시대의 우리를 은유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인간의 동물화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우연과 마주칠 것인가?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공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아울러 인문학도 공부하고 있다.

정직한 공부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기계, 권력,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승일 캣츠랩 소장·기술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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