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훈의 법과 사회] 판결의 무게

기자 2023. 10. 1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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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 독일 판결문 상단에 적혀 있는 문구다. 사법권도 국민주권의 원리에 충실함을 상징하는 머리말이다. 권력의 근원인 국민의 수임기관으로서 내리는 판결이니 무게감은 엄청나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 언론에서 판결을 비판적으로 보도하거나 가볍게 취급하는 기사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정치인이 관련 판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 시절, 독일 연방법원을 방문해 재판이 언론이나 여론의 영향을 받을 위험성이 있는지 물었을 때, 범죄나 판결에 관한 언론보도가 거의 없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판결문에는 독일 판결문 머리말 같은 거창한 문구는 없다. 그렇다고 독일 판결문보다 권위와 중량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하니 판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수십년 경력의 대법관이 내리는 대법원 판결은 물론이고, 하급심 판결도 마찬가지다. 판사가 국민의 이름은 아니더라도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숙고해 내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시비 걸 정도로 가볍지 않다. 대법원 확정판결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면권으로 날려버릴 만큼 중량감 없는 결과물이 아니다. 영장판사 한 명이 내린 결정이라고 사법 후진국 소리를 들을 정도는 더욱 아니다. 영장판사를 향한 저주와 조롱을 담은 조화가 대법원 담벼락을 둘러쌀 정도로 허술하지도 않다.

이제 법원의 판결이나 결정이 내려지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게 일상이 됐다. 언론에 대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판결이면 환영하고 그렇지 않으면 좌편향, 몰상식, 함량 미달 법관 운운하며 사설 형식을 빌리거나 논평,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 판결한 판사의 신상을 털거나 고소, 고발도 난무한다.

근거가 있는 정당한 비판이면 당연히 받아야 한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부와 판결이 비판적 공론의 대상이 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사법에 대한 국민의 감시와 입법의 사법 견제가 민주주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재판을 방청할 수 있고 판결문도 공개하는 이유다.

문제는 확정되지도 않은 하급심 판결을 감정을 섞거나 이념의 잣대로 난도질하고, 판결이 아니라 판결한 판사의 자질과 성향까지 들먹이는 것이다. 아무리 언론의 자유와 알권리가 보장된다고 해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기자나 정치인이 사건의 전말을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재판의 전 과정을 방청한 것도 아니다.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사안일 수 있는 데도 세세한 부분은 모른 채 대략의 줄기만 알고 판결문을 접하면 잘못된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법관은 각자가 재판상 독립돼 있으므로 유사하게 보이는 사건에 대해 재판부마다 서로 다른 판결이 내려질 수도 있다. 법 규정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고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데 필요한 증거에 대한 심증 형성이 다를 수 있다.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왜 똑같은 사안인데 판결이 제각각이냐고 비판한다. 형량도 판사마다 다르다고 뭐라 한다.

법정에서 양 당사자의 치열하고 지난한 공방을 다 지켜본 사람은 재판부뿐이다. 검사와 피고인과 그 변호인도 참여하나, 그들의 시각은 주관적이고 일방적이다.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고 관찰한 사람은 판사뿐이다. 사건에 관해, 양형 사유에 관해, 도주 우려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지에 관해 가장 잘 알고 불편부당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판사다. 그가 헌법과 법률, 양심을 걸고 내린 판단이니 신뢰해야 한다. 언론과 정치인, 시민의 선 넘은 개입은 사법 불신을 부추길 수 있다.

심급제도가 있는 이상 정당한 비판이라도 언론이나 정치권은 최종심까지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에 의해 재판이 좌우될 위험성이 커진다. 사법의 외부로부터의 독립은 멀어질 수 있다.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고려대 명예교수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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