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발` 안받는 한은 통화정책… 동결해도 대출금리는 치솟아
'경기냐 물가냐' 모호한 정책 탓
"시장 상황 금리결정에 반영해야"
이창용, "1%대 금리 기대 마라"
한국은행(한은)은 19일 금융통화위원 전원 일치로 기준금리를 현재의 연 3.50%로 동결했다. 시장 예상대로다. 지난 2·4·5·7·8월에 이어 6차례 연속 동결이다. 물가가 재반등하고 가계부채는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도 11개월 만에 최고 수준에 이르는 등 금리 인상 요인이 있지만, 경기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일단 동결한 뒤 상황을 지켜보자는 판단으로 해석된다. 물가·가계부채 억제와 경기 부양 사이에서 9개월째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선 기준금리를 동결해도 대출금리는 급등하는 모습이다. 기준금리 동결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이는 통화정책 전달경로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안갯속 경제에 9개월째 '관망'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통화정책방향 회의 의결문에서 동결 배경에 대해 "물가상승률이 기조적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지만 주요국 통화 긴축 기조 장기화,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 등으로 물가와 성장 전망 경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물가상승률 둔화 속도가 예상보다 완만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가계부채의 증가 흐름도 지켜볼 필요가 있는 만큼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소비자물가와 관련해 "상승률이 올해 말 3%대 초반으로 낮아지고 내년에도 완만한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면서도 "다만 높아진 국제 유가와 환율의 파급 영향, 이스라엘·하마스 사태 등에 따른 물가 상방 리스크(위험) 등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 수준(2%대)에 수렴하는 시기는 당초 예상보다 늦춰질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국내 경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출 부진 완화로 성장세가 점차 개선되면서 올해 성장률도 8월 전망치(1.4%)에 대체로 부합할 것"이라며 "다만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 주요국 통화 긴축 기조 장기화 등의 영향으로 향후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앞서 2020년 3월 16일 금통위는 코로나19 충격으로 경기 침체가 예상되자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0%포인트(p) 낮추는 이른바 '빅컷'(1.25→0.75%)에 나섰고, 같은 해 5월 28일 추가 인하(0.75→0.50%)를 통해 2개월 만에 0.75%p나 금리를 빠르게 내렸다. 이후 무려 아홉 번의 동결을 거쳐 2021년 8월 26일 마침내 15개월 만에 0.25%p 올리면서 이른바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섰다. 그 뒤로 기준금리는 같은 해 11월, 지난해 1·4·5·7·8·10·11월과 올해 1월까지 0.25%p씩 여덟 차례, 0.50%p 두 차례 등 모두 3.00%p 높아졌다. 하지만 금리 인상 기조는 사실상 지난 2월 동결로 깨졌고, 3.5% 기준금리가 이날까지 약 9개월째 유지되고 있다.
한은이 6연속 동결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배경은 역시 불안한 경기 상황이다. 2분기 성장률(전분기 대비 0.6%)은 1분기(0.3%)보다 높지만, 민간소비(-0.1%)를 비롯해 수출·수입, 투자, 정부소비 등 모든 부문이 뒷걸음쳤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크게 줄어 순수출(수출-수입)만 늘면서 수치상으로는 겨우 역성장을 피했다.
그렇다고 경기에만 초점을 맞춰 기준금리를 낮추기에는 가계부채·환율·물가 등이 걱정거리다. 은행권과 전체 금융권의 가계대출은 지난달 각 4조9000억원, 2조4000억원 또 늘어 4월 이후 6개월째 증가세를 유지했다. 미국(5.25∼5.50%)과의 기준금리 역전 폭이 사상 초유의 2.0%p까지 커진 가운데 이달 초 환율은 11개월 만에 가장 높은 1363.5원까지 뛰었다.
9월 3.7%로 뛴 소비자물가는 국제 유가 향방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NH투자증권 강승원 애널리스트는 "10월 금통위의 핵심 키워드는 불확실성"이라며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 한은은 움직이기보다 상황을 지켜보는 전략(wait and see)을 고수할 것임을 재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주요국 경기 둔화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한은이 금리를 올려 경기를 위축시키기 어렵다"며 "그렇다고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는데 금리를 낮추기도 힘들다. 금리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어려운 상황이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진단했다.
◇이창용, 또 '영끌족'에 경고…"1%대 금리 기대 마라"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금리가 금방 예전처럼 다시 1%대로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며 빚을 내 집을 사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가계부채 억제와 관련해선 "정 안 되면 금리를 통한 거시적인 조정도 생각해보겠지만 그런 단계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결국 부동산 가격의 문제"라며 "통화정책이 부동산 가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통화정책으로 부동산 가격을 오르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우려와 관련, "시장 충격 없이 구조조정 중"이라며 "(지난해와 비교해) 질서 있는 조정 국면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격차에 대해서는 "금리차 (축소) 자체는 정책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약발 안먹히는 기준금리
경제를 조절할 수 있는 경제정책의 양대 축은 정부의 재정정책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조정을 통해 시중금리를 조절함으로써 경기를 부양하거나 물가 안정을 꾀하게 된다. 기준금리를 내리면 시중금리도 내려 총수요를 부추길 수 있으며, 반대로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중금리도 올라가 총수요를 억제해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 한은의 통화정책이 잘 작동하려면 통화정책의 전달경로에 이상이 없어야 한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조정하는 데 시중금리가 함께 오르거나 내리지 않으면 정책목표 달성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동결해도 최근 주택담보대출금리 등 시중 금리나 회사채 금리가 뛰는 것은 통화정책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은에 대한 시장 신뢰성이 떨어져 통화정책이 무력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은이 물가와 경기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한은이) 금리를 점진적으로 조정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가계부채 급증세를 키우며 오히려 성장 측면에서 부정적 요인을 강화시키고 있다"며 "금리를 과도하게 올리거나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을 금리 결정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현철·이미선기자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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