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개발에 대응하는 빠른 대처가 ‘부촌 진입 입장권’

서울앤 2023. 10. 1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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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⑪ 부록 : 서울 부촌의 변천

[서울&]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 북쪽을 개발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규모 주거지로 개발된 종로구 평창동 주거단지.

해방 뒤 첫 부촌은 적산가옥 밀집 지역

5·16 뒤 동빙고동에는 고관 주택 즐비

일반 서민들 ‘도둑촌’이라 부르며 비판

1·21 사태 뒤 평창동에 주택단지 개발

고속도로 개통 뒤 한남·성북동 떠올라

70년대엔 한강변에 새롭게 부촌 형성

80년대 이후의 새 부촌은 모두 강남

‘부익부 빈익빈’ 완화 방안 모색해야

해방 뒤 미군정의 지원 아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리 사회는 미국 자본주의체제에 급속히 편입됐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를 중시하며 빈익빈 부익부를 전제로 사회구조는 변화 발전해왔고, 서울시민의 거주지 역시 그러한 사회변화에 맞춰 부촌과 달동네를 양극으로 거주민들의 재력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띠며 구분돼왔다.

특히 서울의 부촌 형성은 도시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서울 거주지의 양극화는 서울시 도시개발정책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제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심화해왔다. 그렇다면 1945년 8·15 해방 이래 서울의 부촌은 어떤 곳에 형성됐으며,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거주했는지 알아보고 또 그 뒤 서울의 도시개발과 함께 그 변화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해방 이후 몇 년 동안은 경제 건설보다는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 보냈고, 바로 이어 전쟁과 전후 복구를 경험하면서, 서울의 도시계획은 1960년대 중반까지 전무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서울의 부촌이란 새로운 도시개발에 의한 신흥주거지가 아니었다. 당시 서울의 부촌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곳, 즉 적산가옥이 밀집한 곳이었다.

적산가옥이 주로 밀집된 곳은 청계천 이남 중구와 사대문 밖 일본군이 있던 용산구였다. 1884년 12월4일 일어난 갑신정변을 거치며 일본영사관이 중구 필동에 들어서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됐다. 또 러일전쟁(1904년 2월8일~1905년 9월5일) 시기 일본군이 용산에 자리잡으면서 이곳 역시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다. 따라서 1960년대 중반까지는 중구와 용산구 일대가 서울의 최대 부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1926년 조선총독부가 필동에서 종로구 경복궁으로 이전하면서 종로구에도 일본인 마을이 꽤 형성돼 해방 뒤 서울의 부촌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성북동 고급 주택단지에는 재벌가뿐만 아니라 외교관저가 많이 들어서 있다. 그 입구를 ‘우정의 공원’으로 꾸몄는데 이곳에 입주한 각국의 깃발이 게양돼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구에는 필동을 중심으로 명동, 회현동, 장충동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게 부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종로구에도 총독부 관사가 밀집했던 효자동과 내수동, 동양척식회사 관사촌이 있던 통의동 등이 부촌을 형성했다. 또한 조선식산은행의 관사가 밀집된 종로구 송현동은 해방 뒤 미군에 양여되어 미대사관사택촌으로 바뀌었다.

한편 일본군사령부와 군부대가 자리하던 용산 일대도 후암동과 청파동을 중심으로 넓은 일본인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고, 또한 원효로 일대에는 조선철도청 관사촌이 있었다.

이처럼 해방 뒤 1960년대까지는 이들 적산가옥마을이 서울의 부촌을 형성했는데, 이를 불하받아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좀더 쉽게 우리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때 각종 친일 강연을 했던 친일 모윤숙(1910~1990)이 회현동 적산가옥을 불하받았으며, 일본군과 대한민국 국군에서 복무한 김창룡(1920~1956), 일본 육군에 복무했던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1924~2009),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5·16 쿠데타 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낸 장도영(1923~2012) 등 군 관계자들은 청파동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이후 1950년대 말 미군 장성과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한남동 유엔빌리지가 건설됐다. 물론 이곳에 정일권(국무총리), 박종규(경호실장), 이학수(광명출판사장) 등 일부 한국인도 입주했지만 이곳의 주된 거주자는 외국인이었기에 이곳을 서울의 새로운 부촌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1960년대까지는 적산가옥마을을 중심으로 서울의 부촌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삼성의 본가라 할 수 있는 장충동은 삼성타운으로,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가옥(오른쪽)이 있으며 이 일대는 이병철의 후손과 삼성그룹, 신세계그룹 등이 대거 소유하고 있다.

이후 5·16 쿠데타 당시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던 1201육군 공병단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고관들이 호화주택을 지어 살았다. 하지만 1969년 국회의원 조창대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장례식을 통해 이곳의 호화로움이 알려지면서 ‘도둑질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뜻의 ‘도둑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이곳 주민들은 모두 이사를 가고 현재는 주한외국 대사관들이 주로 들어서 있다.

한편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한 1968년 1·21사태를 겪으며 청와대 북쪽에 대한 개발이 본격화했다. 이때 북악스카이웨이와 더불어 평창동 주택단지가 개발됐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와 삼청터널이 완공되면서 한남동과 성북동이 개발돼 이 일대가 서울 최고 부촌으로 떠올랐다. 참고로 1968년 발표된 시인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당시의 도시개발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즐기던 비둘기마저 쫓겨가는 아쉬움을 그린 것이다. ‘성북동 비둘기’의 첫 구절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에 이런 정서가 잘 표현돼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평창동은 서울시의 도시개발 영향으로 형성된 부촌이지만 성북동과 한남동 등은 서울시 도시개발보다는 그야말로 부자들의 자발적 개발에 의해 부촌이 된 곳이다. 그리고 당시 개발된 이곳은 모두 산 중턱에 위치한 주택지로 자가용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지형이다. 그야말로 부자들만의 공간을 이루며 이후 새로운 부촌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전히 ‘최고의 부촌’ 중 한 곳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조성된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 본래 이곳 주택단지는 주한미군의 고급장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일권(국무총리), 박종규(경호실장), 이학수(광명출판사장) 등 권력층과 재벌가들도 거주했다.

그리고 1967년 영등포와 노량진의 한강변을 잇는 4차선이 개통되면서 시작된 강변도로 공사가 더욱 진척되면서 한강변이 새롭게 부촌으로 떠오르게 된다. 1970년 준공된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를 시작으로 동부이촌동 일대, 그리고 여의도 윤중제 건설과 함께 1971년 완공된 여의도시범아파트를 비롯한 동여의도 일대의 아파트촌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도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부촌인 이곳들의 지위는 앞서 언급된 성북동, 한남동 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방 뒤 1970년대까지 서울의 부촌은 이처럼 이른바 강북 지역에 형성됐다. 하지만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서울시의 강북 억제, 강남 개발 정책이 집중되면서 1980년대 이후 새로 생기는 서울의 부촌은 모두 강남에 집중됐다. 강남의 부촌은 강북에 조성된 기존 부촌과 달리 좀더 넓은 의미의 ‘중산층 부촌’이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른바 강남 3구는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시로 편입된 곳이다. 이곳은 개발 초기에는 자기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영동지구’라는 명칭으로 개발됐다. 따라서 처음에는 강북 지역으로의 접근이 가까운 제3한강교 남단 영동사거리 일대 압구정동이 부촌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서울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강남 개발은 더욱 남쪽으로 확장됐다. 이에 대치동, 도곡동 일대가 입시학원촌과 맞물려 새로운 부촌으로 떠올랐으며, 심지어 강남 개발 초기 ‘개도 포기한 동네’라며 비웃던 양재천 이남의 개포동이 이제는 ‘개도 포르셰를 타고 다니는 동네’라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변했다.

1970년대 남북 대치 속 전쟁 대비 차원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은 1990년대 중반 외환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체제에 편입되면서 우리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를 더욱 확대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1970년대까지 점점이 존재했던 부촌이 이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크게 양분돼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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