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 학생들 “남 권리 침해하면서까지 저렴한 학식 먹고싶지 않아”
학교, 공무직 채용 중단·계약직 ‘돌려막기’
“한예종 구성원 문제” 학생들 연대 움직임
19일 오후 1시쯤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캠퍼스 예술관 공터에 학생 1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각자 손에 흰색 실을 걸었다. 이후 형형색색의 실을 당기고, 걸어가며 실뜨기를 해나갔다. 이번달 집단 사직한 교내 조리사들과 연대하겠다는 뜻을 담은 ‘식판 실뜨기 퍼포먼스’였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의 참여도 늘었다. 20여 분쯤 흐르자 실을 잡은 학생의 수는 30여 명이 됐다. 오후 2시쯤 식판의 꼴을 갖춘 실뜨기가 완성됐다. 퍼포먼스를 기획한 21학번 김희우씨는 “교내 노동자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서로 마주 보며 친근하게 참여할 방법을 고안하다가 실뜨기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 교내 게시판에는 지난 5일 한예종 대학노조 명의로 ‘강도 높은 노동만을 강요당하고 사람대접도 못 받는 우리는 한예종을 떠나려 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한예종에서 공무직으로 일하던 급식조리사 4명 전원이 사직서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공무직은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고용이 보장된 직원을 말한다.
조리사들은 과도한 업무부담을 사직 이유로 들었다. 코로나19 이전까지 공무직 조리사 8~9명이 일했으나 대학이 공무직 채용을 중단했고, 이 때문에 공무직이 정년으로 퇴임한 자리를 4개월 단위 계약직으로 ‘돌려막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을 기준으로 남은 공무직 직원은 4명이었다. 대학노조는 대자보에서 “학교 측은 지난해부터 3번 계약직을 채용을 진행했지만 대부분 열악한 근무환경을 이유로 재계약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리사들은 지난 9월 “조리실 운영에 최소 7명의 공무직이 필요하다”며 파업에 나서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 없었다. 총장과의 면담도 불발됐다. 대학 측은 지난 12일 입장문을 내고 “구내식당 인건비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만 부담하고 있다. 장기간 등록금 동결과 비교적 낮은 가격에 식사를 제공해야 되는 구내식당 특성상 근속 연수에 따라 기본급이 인상되는 공무직 충원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결국 조리사들은 집단 사직서를 냈다. 이번 달 말까지 차례로 학교를 떠난다. 이곳에서 2019년부터 일해온 식당조리사 유현주씨(58)는 “다른 조리사 선생님들이랑 항상 하던 말이 ‘한예종에 뼈를 묻자’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다들 사직을 한다고 해서 나도 처음에는 놀랐다”면서 “사직서를 낸다고 했을 때도 ‘뭐가 힘드냐’는 말 한마디 없이 사직서를 수리해주는 것을 보고 ‘이곳에는 더 못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예종 학생들 사이에서 조리사들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한예종 인권위원회는 지난 6일부터 조리 노동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을 받고 있다. 청원에는 “학교는 지금껏 비정규직 고용에 대해 안일한 태도로 임해왔다. 이번 사안은 단지 조리실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한예종 구성원의 문제”라는 내용이 담겼다. 19일 오후 3시 기준 학내 구성원을 비롯해 720명이 청원에 참여했다. 한예종 인권위 관계자는 “예상보다 큰 호응이라 놀랐다. 학생들이 노동자의 인권에 관심이 높고, 조리사 선생님들을 학내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날 구내식당을 찾은 음악학과 19학번 김모씨(23)는 “에브리타임에서 처음 조리사분들의 사직 소식을 접했는데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셨다는 걸 알고 놀랐다”면서 “등록금이나 식대 인상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동의할 수 있다. 남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싼 밥을 먹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지난 18일이 마지막 근무였던 유씨는 “한여름에 땀띠날 정도로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는 건 학생들뿐”이라며 “‘이모, 저 왔어요’ 인사해주던 학생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에게 ‘마지막 근무니까 맛있게 먹고 가’ 웃으며 말했는데 마음속으로는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이날이 마지막 근무인 조리사 박영남씨(52)는 “다른 사람들이 온다면 우리와는 다르게 대우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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