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백사마을, 그림·영상에 담아요”
[서울&] [자치소식]
주민 18명 참여, 해설사와 둘러보며
기억하고픈 마을 모습·이야기 찾아
디지털 드로잉·스마트폰 영상 촬영
11월 말 마을영화제서 전시할 예정
“백사마을에서 고생하며 사셨던 부모님께 추억을 선물해드리고 싶었어요.”
노원구 하계동에 사는 김효선(45)씨는 언니 은영(48)씨와 초등 5학년 아들과 함께 재개발을 앞둔 백사마을(중계동 104번지)을 기록하는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뭐 하러 가냐’는 반응을 보였던 은영씨는 공사가 내년쯤 시작될 수 있다는 동생의 얘기에 마음을 바꿨다. 아들은 영상 촬영과 편집을 도와주러 엄마를 따라왔다.
마을에 들어서면 쓰러지기 직전의 집들을 마주한다. 나지막한 슬레이트 지붕에는 천막, 타이어 등 온갖 종류의 덮개가 덧씌워져 있다. 큰길에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을 만난다. 마을 중앙에 위치해 ‘배꼽’으로 불리는 5통 4반은 자매의 가족이 1970년 후반 이사해 약 20년 살았던 곳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은 폐허로 변했지만, 88계단 등 동네 곳곳에 옛 추억을 떠올리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언니 은영씨는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와보니 하나둘 기억난다”며 “동네의 크고 작은 골목길과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멋진 경치를 못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쉽다”고 했다. 동생 효선씨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곳을 여러 사람이 같이 영상으로 찍어 기억할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 ‘백사마을 그리고 기억해’ 참여자들은 7일 오후 셀카봉을 들고 백사마을 입구에 모였다. 전체 8회 수업 중 5번째이고, 수강생 9명 중 6명이 출석했다. 앞서 이들은 영상 제작 과정을 이해하고 소재 찾기 과정을 거쳤다. 마을을 찾아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본 뒤 기획안을 만들고 영상 촬영 방법을 배워가며 촬영 실습을 한 차례 했다.
이날은 두 번째 실습으로 강사 조일수씨가 영상 촬영 방법을 안내했다. “오늘처럼 흐린 날씨엔 빛이 확산해 채도가 낮아지니, 마음이 가는 피사체는 가깝게 다가가 찍는 것이 좋다”고 알려줬다. 조씨는 산기슭을 따라 들어선 집들의 얼룩진 콘크리트 벽돌 담벼락과 벗겨진 페인트칠 등 세월의 자국을 어떻게 담는 게 좋은지 설명했다.
참여자들은 각자 1시간여 동네를 다니며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 모습과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다. 안명순(68)씨는 남아 있는 주민들 이야기를 영상에 담고 싶어 했다. 외부인들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지만 안씨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민 2명의 집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재개발 논의가 오가며 남은 주민들의 마음이 많이 황폐해졌다”며 “외부인에 대해 처음엔 적대적이지만 한두 마디 나누면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을 찾기 위해 영상을 찍는 참여자도 있었다. 정민성(65)씨는 “1960~70년대 동네 모습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좋다”며 “낡았지만 아련한 추억이 있는 그리운 고향으로 주제를 잡았다”고 했다. 강사 조일수씨는 “수강생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5분짜리 영상을 만들고 있어 결과물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노원문화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 지역 생활문화 확산 지원사업에 선정돼 추진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재단은 그동안 백사마을 아카이빙 작업을 이어왔고, 이번엔 주민이 참여해 디지털 펜 드로잉과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는 프로그램을 노원마을미디어지원센터와 손잡고 진행했다. 두 기관은 참여자들이 마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접하며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기록할 수 있게 도왔다. 참여자들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마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는 반응이 많았다.
지난달 끝난 디지털 펜 드로잉 프로그램에는 20~60대 주민 9명이 참여했다. 수강생들은 5회 수업 동안 해설사와 마을 탐방을 하며 찍은 사진을 토대로 디지털 펜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채색 방법을 익혀 작업해 엽서로 출력했다. 김수현(49)씨는 “처음으로 아이패드 드로잉을 접했는데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며 “첫 작품으로 백사마을을 그릴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고 했다.
백사마을 재개발은 올해 관리처분 인가가 나면 내년에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현재 80% 이상이 이주해 대부분 빈집이고, 140여 가구 300여 명이 남아 있다. 백사마을은 노원의 마지막 달동네로 1967년 청계천, 용산 등 도심 판자촌에서 쫓겨난 1100여 가구 주민들이 불암산 자락을 깎고 자리잡은 마을이다. 맨주먹으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길을 냈다. 가게가 들어서고 시장도 생겼다. 이렇게 해 3천여 주민이 그 삶을 붙이는 마을 하나가 형성됐다. 40년 가까이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로 묶여 있어 입주 당시의 지형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한 재개발 추진 파고 속에서 백사마을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도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사진, 그림, 영화 등으로 담고 마을 탐방 투어도 정기적으로 진행돼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꾸준했다. 몇 년 전부터 재개발 논의가 다시 불붙으며 탐방 투어는 주민들의 반대로 중단됐다. 이후 소수가 참여하는 활동만 간간이 이뤄지고 있고, 이번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수강생들의 활동 결과물인 그림과 영상은 다음달 말쯤 전시될 예정이다. 노원문화재단은 ‘사라질 마을, 살아갈 마음을 위한 영화제’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열고 작은 전시회를 곁들일 계획이다. 관람객들은 영화관 로비 공간에서 참여자들이 영상, 펜 드로잉 그림에 담아낸 백사마을의 모습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노원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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