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청년 봉준호와 영화광들의 열정…다큐 '노란문'

이영재 2023. 10. 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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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감독의 미공개 첫 단편영화와 동아리 멤버들 이야기
2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
영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기생충'(2019)과 같은 명작들로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 봉준호 감독의 첫 작품은 공식적으로는 단편 '백색인'(1993)이지만, 그보다 앞서는 미공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단편 '룩킹 포 파라다이스'(1992)다.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의 고릴라 인형이 '똥 벌레'의 공격을 피해 낙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23분짜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봉 감독은 이 작품을 자신이 속해 있던 영화 동아리 '노란문' 송년회에서 10여명의 멤버들에게 보여줬다. 그의 생애 첫 시사회였다.

이혁래 감독의 신작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는 '룩킹 포 파라다이스'에 대한 노란문 멤버들의 회상을 통해 1990년대 젊은 영화광들의 삶과 열정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오는 2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봉 감독을 포함한 노란문 멤버 10여명이 출연했다. 노란문의 리더였던 최종태 감독도 나온다.

이 영화는 지난해 초 노란문 멤버들이 화상회의를 통해 30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노란문 멤버들의 개별 인터뷰 영상도 보여준다. '룩킹 포 파라다이스'의 주요 장면뿐 아니라 노란문 멤버들이 공부했던 고전 영화들의 명장면도 펼쳐진다.

최 감독은 "('룩킹 포 파라다이스'에서) 봉준호 감독의 에센스는 거의 다 나왔다"며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 '기생충'에서 보듯 지하실이 중요한 공간으로 설정된 것을 예로 든다.

그러나 봉 감독은 "(멤버들에게 처음 보여줬을 때) 너무 부끄러워 귀밑까지 새빨개졌다"고 털어놓는다.

청년 시절 봉 감독의 동경이 담긴 '룩킹 포 파라다이스'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이미 그 시절부터 자기 삶을 영화에 걸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봉 감독은 노란문 멤버 한 명과 아파트 지하실에서 이 영화를 찍었다. 새벽까지 작업이 이어지자 봉 감독의 어머니가 지하실로 내려와 "아직도 안 끝났냐"고 물었다고 한다.

영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노란문은 1990년대 초 동국대 대학원 휴학생이었던 최 감독을 주축으로 결성됐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연세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의 영화광들이 입소문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권 붕괴로 학생운동이 방향을 잃으면서 청년들은 열정을 분출시킬 대상을 찾아 나섰고, 노란문과 같은 모임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어린 시절 집에서 TV로 영화를 즐긴 봉 감독은 중·고교 때부터 감독의 꿈을 키웠지만, 노란문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최 감독의 추천서인 '세계영화사'는 지금도 봉 감독의 책장에 꽂혀 있다.

노란문은 고전 영화를 감상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봉 감독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사랑의 묵시록'(1973)을 보고 토론한 걸 지금도 기억한다.

영화광들의 작은 동아리였던 노란문은 최 감독이 등록금을 털어 사무실을 얻으면서 '노란문 영화 연구소'로 발전한다. 멤버들은 사무실 문과 집기를 노란색으로 칠하고, TV, VTR(비디오테이프레코더), 영화 비디오테이프 등을 들여놓는다.

봉 감독은 보물 같은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구해오는 데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영화 속 인터뷰에서 "덕후의 원동력은 집착"이라며 웃는다. 당시 노란문의 비디오테이프 목록엔 500여개의 영화 제목이 적혀 있다.

노란문 사무실의 VTR은 조그셔틀 기능이 있어 멤버들이 영화를 장면별로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됐다. 노란문이 1993년 봄 발간한 첫 자료집엔 봉 감독이 영화 '대부'(1973)의 장면을 분석한 그림이 실렸다.

영화 '노란문'은 오늘날 한국 영화를 이끌어가는 봉 감독의 재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1990년대 영화광들의 공동체에서 형성됐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 속 봉 감독처럼 영화의 꿈을 품은 청년이라면 한 번쯤 봐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봉 감독과 같이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4050 세대는 이 영화에서 짙은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혁래 감독도 노란문 멤버였다.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청계피복노동조합에서 활동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미싱 타는 여자들'(2022)에 이어 1년 만에 내놓은 다큐 영화다.

'노란문'은 이달 초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초청돼 '부산시네필상'을 받았다.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 심사위원단이 선정한 작품에 수여되는 상이다.

영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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