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ASML 같은 대형 반도체 장비 업체 키워야"
(지디넷코리아=이나리 기자)"한국이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ASML,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 도쿄일렉트론(TEL)과 같은 기술 집약적인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체를 키워내야 합니다."
노화욱(69)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장은 지디넷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하며 "한국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두 소자기업에만 종속되어서는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노화욱 회장은 국내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반도체 전문가다. 1977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1984년부터 20년간 현대전자, 하이닉스에서 상무, 전무를 역임했다. 이후 충청북도 경제부지사와 극동대학교 석좌교수를 거쳐 2019년부터 비영리단체인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반선연)는 전현직 임원들과 대학 교수, 소부장·팹리스·후공정(OSAT) 기업 전문가들이 참여해 국내 반도체 생태계와 산업 발전을 연구하는 단체다.
노 회장은 “한국은 반도체 경쟁국인 미국, 일본에 비해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담당하는 산업 생태계가 매우 열악한 상황”이라고 지적하며 “오늘날 미국이 중국과 무역전쟁을 선포함과 동시에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소위 ‘갑질’을 할 수 있는 배경은 반도체 장비 및 소프트웨어(EDA) 회사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또한 장비와 소재 기술에서 강하다”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 점유율은 1위 미국 AMAT, 2위 네덜란드 ASML, 3위 미국 램리서치, 4위 일본 TEL, 5위 미국 KLA 순이며, 상위 4개 업체가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한다. 상위 10개 반도체 장비 업체 순위에 이름을 올린 한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다음은 노화욱 회장과 일문일답이다.
Q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 위기라던데?..."삼성·SK가 기침하면, 2차 벤더는 생사기로에 선다"
"메모리 반도체 불황으로 국내 장비 업체 또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1차 벤더는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상황이다. 수주가 유보된 것이지 납품이 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 1년 정도만 버티면 구조조정에 들어가지 않고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문제는 2차 벤더들이다. 2차 벤더 업체가 공급한 부품 및 장비를 가지고 1차 벤더 업체들이 조립하는 방식이 다수다. 이들 업체는 인지도(네임 벨류)가 없다는 이유로 금융권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부의 정책 수혜에서도 늘 그늘에 가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영세한 반도체 장비 업체는 휴업 또는 문을 닫는(폐업) 사태가 올해 연초부터 도미노로 나오고 있다.
즉,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기침하면, 2차 벤더 업체들은 중병을 앓게 되는 셈이다. 국내 장비 업체들이 해외에 진출하지 못하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두 소자 업체에만 목을 매고있는 현실이 이유다. 이렇듯 국내 반도체 시장이 성장하려면, 취약한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Q. ASML과 같은 기술 집약적인 글로벌 기업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반도체 장비 수요 또한 폭발적이다. 우리 장비 산업 또한 수요에 발맞춰 빨리 기술을 축적해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현재 세계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 산업에서 실질적인 게임 체인저는 누구라고 보는가? 인텔도, 삼성도, TSMC도 아니다. 이 회사들의 생산 캐파나 로드맵의 운명을 쥐고 있는 반도체 장비 회사다. 우리는 반도체 제조업체가 ‘갑’이라고 얘기하지만, 미중갈등에서 보듯이 실질적인 갑은 장비 업체들이다. 앞으로 장비 개발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반도체 시장에서 성장할 수 없다. 세계 소자산업은 자본력으로 보편화된다.
미국 AMAT, 램리서치, 일본 TEL, 네덜란드 ASML 등 장비 회사는 글로벌 강자다. 특히 ASML은 세계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장비를 공급해 ‘슈퍼 갑’으로 불리며, 반도체 시장을 좌지우지한다. ASML은 1984년도에 필립스에서 반도체 장비 담당하던 엔지니어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회사로 초창기에 100명 규모로 시작해 현재 글로벌 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천문학적인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 금액의 70%가 장비 구입 비용이다. 반도체 8개 공정을 세분화하면 180여개 공정으로 나뉘는데, 각 공정에 모두 장비를 필요로 한다. 그 중 제일 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장비는 리소그래피 장비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대다수 장비를 미국, 일본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다. 우리가 반도체 생산시설을 투자할수록, 미국, 일본, 네덜란드 장비 업체들이 돈을 벌게 되는 셈이다. 반도체 장비를 국산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경쟁에서 살아남기에 어려울 것이다."
Q. 그동안 한국은 왜 글로벌 장비 기업을 육성하지 못했나?
"메모리 반도체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이미 검증된 미국과 일본 업체 장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장비 성능이 검증 안되면, 수율을 담보하지 못하는 우려와 책임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과 일본 업체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Q. 일본 반도체 소재 3종 수출 규제가 소부장 중요성을 알게 한 계기였다.
"그나마 최근에 국내 소부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근본적인 영업환경이 바뀌게 된 것은 고 아베 총리가 2019년 수입의존도가 높은 소재 3종(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해 수출을 규제하면서 부터다. 이 소재가 없으면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 사실상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중간의 반도체 전쟁 전략은 아베 총리가 먼저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작용으로 초래하는 진리나 지혜가 엄청 많다. 우리는 아베 총리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목을 조르는 ‘적장’인줄 알았는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부분을 깨닫게 해줬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소자만 1등하면 반도체 1등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우리의 급소를 쥐고 있는 500개 이상의 일본 업체 리스트를 알게 됐다. 이후 한국 기업은 다수의 소재를 내재화 다변화에 성공했고, 열심히 개발 중이다.
앞으로도 다원적인 정치적인 갈등이 생기고 군사 외교적인 이슈가 경제 문제와 맞물려 발생할 때 정부는 대안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 기업도 항상 비상사태를 대비해 국내에 듀얼 벤더를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장비 회사에 대한 대외 의존도가 너무 심하다. 그러나 이것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아서 안타깝다."
Q.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국내 반도체 시장을 위해 개선시켜야 하는 점은?
"반도체는 워낙 크리티컬한 산업이고, 속도와 물량, 원가경쟁력이 핵심인 산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두 대기업은 절대로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지난 40년동안 고착화된 고정관념을 깨야만 한다. 삼성의 반도체 장비 자회사 세메스는 이제 막 매출 1조원을 넘긴 수준으로 나아갈 길이 멀다.
또 SK는 반도체 소재 부품과 관련해 SKC 등 많은 자회사를 만들어 수직계열화에만 주력하고 있다. 이는 자체기술 개발 및 창업보다는 M&A를 통해 확장한 기업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수직계열화는 위험하다. 삼성과 SK는 일본의 NEC, 히타치, 도시바와 같은 기업이 수직계열화로 메모리 주도권을 한국에게 빼앗기고 몰락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도시바는 돈이 되는 소부장을 전부 수직 계열화시키고, 경쟁력 있는 실적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결과 자회사들만 살아남고, 모회사는 결국 망했다.
이런 반도체 역사를 보고 대비하는 것이 필요한데, 전철을 밟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반도체 장비 업체를 발굴하고 적극 육성해서 동반성장을 이뤄내야 한다. 이것이 미국과 일본의 교훈이다."
Q. 매년 반도체 업계 퇴사 인력이 1000명에 달하지만 갈 곳이 없다.
"매년 국내에서 은퇴 또는 퇴사하는 반도체 엔지니어는 300~1000명에 달한다. 이들 인력은 반도체 전문 기술과 지식을 갖췄지만, 국내 생태계가 협소하다보니 은퇴 후에 갈 수 있는 기업은 국내에서는 거의 없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소자 분야에만 주력한 결과다.
메모리 중심으로 기형적으로 발전해 온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지속가능간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혁신해야 한다. 소부장 산업의 획기적인 진흥책에 착수하지 않으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속 가능한 미래가 없다. 한미일의 역사처럼 메모리 소자산업의 경쟁력은 언젠가는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이나리 기자(narilee@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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