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악의 표준을 완성한 테크노 팝의 원점
20세기 초 전자기기의 발전에 발맞춰 다수의 전자 악기들 또한 개발되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활용한 다양한 움직임들이 생성됐고, 슈톡하우젠과 존 케이지 또한 이를 과감하게 이용하면서 전자 음악이라는 장르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신시사이저의 비약적 발전과 레코딩 시스템의 개발이 서서히 분위기를 형성하는 가운데 장 자크 페리와 웬디 카를로스 등이 보다 대중들이 접근하기 쉬운 형태의 결과물들을 내놓았다.
전자음악의 수많은 선구자들 가운데 그것을 본격적으로 폭발시켜낸 이들이 바로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이들은 ‘전자음악 씬의 비틀즈’였다.
전자 악기와 팝 음악을 결합한 자칭 ‘로봇 팝’ 스타일을 고수하는 한편 감각적인 멜로디와 반복적인 리듬을 강조하면서 스타일리시한 이미지를 채택했다.
신시사이저, 그리고 자체 제작한 전자 타악기패드를 혁신적으로 사용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갔고, 결국 지구상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까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디지털과 컴퓨터 기술의 잠재력을 인식한 ‘최초’의 음악가였다.
플로리안 슈나이더와 랄프 휘터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크라프트베르크를 결성했다.
2차세계 대전 직후에 태어난 이들에겐 가볍게 들을만한 음악이나 대중문화가 없었다. 독일의 민속 음악과 클래식 정도가 존재할 뿐이었다.
이들은 클래식 중 유독 슈톡하우젠에 충격을 받고는 이를 기이한 형태로 계승해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자 음악의 새로운 표준이 된다.
크라프트베르크가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 보코더 등의 전자악기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서독의 크라우트 록 씬의 일부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초창기 두 장의 앨범 <Kraftwerk>와 <Kraftwerk 2>는 전통적인 악기로 구성된 즉흥적인 록 앨범이었는데 사운드를 왜곡하거나 오디오 테이프를 조작하는 등의 작업이 사용되기는 했다.
두 메인 멤버 이외의 여러 멤버를 교체한 끝에 4인조로 굳어졌고 점차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한다.
1974년 발표한 <Autobahn>을 통해 크라프트베르크는 본격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자 음악의 형태를 구축한다.
미국식 로큰롤 풍의 장식은 사라졌고, 미니멀한 리듬으로 끌고가는 <Autobahn>은 전자 음악이 지닌 사운드의 본질을 파고드는 결과물이었고 동시에 모더니즘 건축에서 영감 받은 미학을 음향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Autobahn>으로 독일과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이듬 해 <Radio-Activity>를 공개했다.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실험을 뒤로 하고 일렉트로닉 팝 성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이들은 마치 새로운 시대의 초자연적인 교향곡을 완성하려는 듯 보였다.
이 음울한 사운드는 전쟁 전후 유럽의 고립된 세계를 반영했으며 또한 중독적이었다. 데이빗 보위가 이 음반을 듣고 크라프트베르크에게 <Station to Station> 투어를 함께하자 제안했지만 이들은 제안을 거절한다.
독일을 넘어 유럽의 새로운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했던 크라프트베르크는 130개 도시를 연결했던 유럽 철도 서비스 <Trans-Europe Express>를 앨범의 제목으로 채택한다.
매체에서는 “유럽을 향한 소리의 시”라 극찬했으며 조이 디비전의 이안 커티스는 매번 무대에 오르기 이전 공연장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이 앨범을 재생할 것을 요청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선명한 커버 아트웍과 함께 테크노 팝의 이미지를 결정한 앨범 <The Man-Machine>은 동시대에 매우 영감을 주는 사운드로 완성해냈다.
특히 보다 팝 적인 형태의 <Computer World>에서는 누구나 당연하게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예측했다.
하지만 이 앨범을 작업할 당시 크라프트베르크 멤버들은 컴퓨터가 없었고 따라서 이 앨범은 오히려 환상에 가까웠다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디지털이라 하면 무기질의 차가운 이미지를 주로 내세웠고 이는 이들의 다음 앨범 <Electric Cafe>에서도 이어진다.
1983년에 싱글로 발매했던 ‘Tour de France’의 확장버전을 17년이 지난 2003년 투르 드 프랑스 자전거 경주 100주년을 기념하여 앨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해내기도 했다.
실제로 랄프 휘터는 진지하게 싸이클을 타곤 했는데 ‘Tour de France’를 발매할 무렵에는 심각한 자전거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가 깨어나자 마자 처음 한말은 “내 자전거 어디 있어?”였다.
한편 2008년 무렵 크라프트베르크의 창립 멤버였던 플로리안 슈나이더가 탈퇴했다. 탈퇴 이후 그는 2015년 플라스틱 오염을 막기 위한 캠페인에 곡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2020년 무렵 암 투병 중 세상을 뜨게 된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작업물은 신스팝, 힙합, 포스트 펑크, 테크노, 앰비언트를 비롯 다양한 아티스트와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아프리카 밤바타는 ‘Planet Rock’에 ‘Trans-Europe Express’를 샘플링했고, ‘Tour de France’의 경우 브레이크 댄스를 다룬 영화 <브레이크댄스(Breakin')>에 삽입되면서 이들이 미국 흑인 댄스 음악에 미친 영향을 증명했다.
참고로 ‘Tour de France’는 90년대 국내 아이돌 그룹 H.O.T의 ‘We Are the Future’에도 일부 샘플링됐다.
콜드플레이는 자신들의 곡 ‘Talk’의 메인 리프를 크라프트베르크의 ‘Computer Love’에서 가져오기도 했으며, 팩토리의 디자이너 피터 사빌 또한 예술적 관점에서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을 언급했다.
무엇보다도 크라프트베르크의 ‘인간로봇(Man-Machine)’ 컨셉과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활용한 다프트 펑크의 예시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결국 2014년 무렵 크라프트베르크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게 된다.
2023년 현재 크라프트베르크는 결성 50주년을 기념하는 라이브 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는 두 차례 내한공연을 다녀간 바 있다.
이들의 공연을 봤을 때 느꼈던 것은 의외로 노래를 열과 성의를 다해 부른다는 점이었는데, ‘Radio-Activity’를 부르다가 한글 가사로 개사해 “이제 그만 방사능”이라 불렀던 것 또한 기억난다.
7, 80년대 시절 곡들을 항상 새로운 형태로 업데이트해 공연에서 들려주고 있고 때문에 이는 여전히 신선했으며 또한 창의적인 것처럼 감지됐다.
팝 음악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인물들이 더러 있지만 그 중 핵심에는 단연 크라프트베르크가 위치하게될 것이다.
이들은 기술의 진보와 자신들의 커리어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곤 했는데, 새로운 전자 악기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들 또한 그 악기를 실시간으로 활용하여 앨범을 작업했다.
그러니까 ‘오르간→멜로트론→아날로그 신스→샘플러→디지털 신스→랩탑’으로의 진화가 이들의 활동 과정과 고스란히 겹쳤고 이 진화의 흐름을 우리는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추상적이며 공간적인 형태의 사운드 디자인, 오히려 지금의 전자 음악에서는 보기 드문 진지함과 장대함으로 앨범을 채워내 왔다.
수많은 이들이 크라프트베르크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이런 음악을 하는 이들은 오직 크라프트베르크 자신들뿐이었다.
☞ 추천 음반
◆ Electric Cafe (1986 / Warner Bros.)
디지털 악기를 사용하여 제작된 최초의 크라프트베르크 앨범. 처음 타이틀은 ‘Technicolor’였지만 저작권 문제로 사용할 수 없었고, 이후 ‘Techno Pop’으로 결정했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회사에서 임의로 ‘Electric Cafe’로 발매해 버렸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재 발매됐을 때는 다시금 <Techno Pop>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 디페쉬 모드나 휴먼 리그 같은 팀들이 활동하던 시기 발매된 앨범이었고 그런 신스팝 그룹들에게 미친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됐다.
◆ 3-D The Catalogue (2017 / Parlophone)
크라프트베르크의 두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으로 4CD 블루레이 박스 세트, 8CD 음반 박스 세트, 그리고 9장의 LP 박스 세트 등으로 출시됐다.
당시 세계 각지 현대 미술관에서 진행한 3-D 멀티미디어 퍼포먼스를 그대로 담은 형태의 앨범이 됐는데, 하루에 자신들의 앨범 한 장 전체를 공연하는 구성이었기 때문에 8장의 CD 각각에는 한 장의 정규 앨범의 라이브 버전이 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현대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 새롭게 업데이트된 버전을 확인할 수 있는 라이브 앨범으로 과도한 반복이 일부 제거되면서 컴팩트하면서도 요즘 시대에 맞는 결과물로 재 편곡됐다.
여전히 미래적인 퍼포먼스가 담겨져 있고, 이는 제 60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부문을 수상하면서 공로상을 제외한 밴드의 첫 그래미 수상작이 됐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pulse="" th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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