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훠궈’ 먹고 자란 헝다·다롄스더 제국의 몰락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덩샤오핑은 중국이라는 좌초 위기에 있던 거대한 배의 새 선장이 됐다. 그는 저 멀리서 점점 더 눈앞으로 다가오는 새 시대의 조류를 감지하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조류 앞에서 그는 배의 키를 쥔 선장으로서 어떻게든 요령껏 ‘파도타기’(弄潮兒·눙차오)를 하면서 ‘붉은 깃발’을 지키며 항해해야 했다.
시대나 역사의 파도를 탄다는 의미로 쓰이는 중국어 ‘눙차오’의 기원은 저장성 항저우 인근에 있는 첸탕강에서 비롯했다. 첸탕강은 하류로 갈수록 완만한 강바닥이 갑자기 높아지는 기묘한 지형 때문에 조수가 3~5m까지 치솟아 멀리서 보면 마치 말 1만 마리가 천둥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듯하다고 한다. 현지인들은 그것을 ‘귀신파도’(鬼王潮)라고 부르며, 해마다 추석을 전후해 나타나는 이 희귀한 자연현상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든다.
1천 년도 훨씬 더 전부터 첸탕강 일대에서는 이 귀신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용감하게 파도의 한중간으로 뛰어들어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공중제비를 돌며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눙차오다. 파도타기에 성공하면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항할 수 있지만, 실패하거나 물의 흐름을 역행하면 배는 좌초되고 파도를 타던 사람들은 다 죽게 된다.
덩샤오핑, 좌초 위기에서 훠궈연회를 열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18~22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를 기점으로 거대한 귀신파도에 올라타서 눙차오를 시작했다. 그는 제11기 3중전회를 통해 계급투쟁 노선을 폐기하고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위한 개혁·개방 정책과 ‘중국특색사회주의’라는 새로운 깃발을 내세웠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흑묘백묘론)는 요지의 중국특색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부자가 되라’고 하면서 모든 인민을 ‘돈 벌기의 바다’(下海)로 떠밀었다. 그중 덩샤오핑이 가장 먼저 등을 떠밀어 파도를 타게 한 사람들은 한때 ‘계급의 적’이자 ‘타도 대상’이었던 민영기업가들이다. 1978년 12월22일 제11기 3중전회가 끝나자마자 덩샤오핑은 그동안 숨죽이며 ‘마오 주석에 순종하고, 공산당을 따르며, 사회주의 길을 걸었던’ 후줴원, 후쯔앙, 룽이런, 저우수타오, 구겅위 등 옛 원로 민영기업가 5명을 초청해 담화를 나눴다. 그리고 1979년 1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훠궈 연회’가 열린다.
1979년 1월17일, 덩샤오핑은 인민대회당 푸젠청에 앞의 옛 원로 민영기업가 5명을 초대했다. 얼마 전 끝난 제11기 3중전회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이와 관련한 원로 기업인들의 의견과 협조를 구하는 자리였다. 그보다 앞서 1월1일, 중국은 건국 이후 줄곧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과 정식 수교를 맺으면서 정치·외교적으로도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맞이했다. 1월27일부터는 새로 발탁된 젊고 유능한 지도자들을 데리고 미국과의 정치·경제 협력을 강화하려는 방문도 예정됐다. 덩샤오핑은 미국에 가기 전 국내에서도 이제 이념과 계급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전 인민이 공동 협력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공동 이익을 추구) 시대가 열렸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제11기 3중전회가 있기 전까지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단 한 개의 사영기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주나 옛 자본가 출신은 자자손손 박해받는 ‘계급의 적’이었다. 그래서 그날 덩샤오핑의 발언을 들은 옛 민영기업가들은 새 역사의 조류가 밀려온다는 확신을 얻었다.
애국정신만 있다면 착취자 아닌 공헌자
덩샤오핑은 원로 민영기업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제안을 허심탄회하게 해보라고 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요구’는 “우리들 머리에 씌워진 ‘자본가’라는 모자를 벗겨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덩샤오핑은 유명한 말을 했다. “더는 착취하지 않는 이상 자본가 꼬리표를 못 뗄 이유가 없다. (…) 돈과 사람은 써먹어야 한다.(籛要用起來, 人要用起來)”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경제건설을 위해서 더 많은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자본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화교와 화상들도 조국으로 돌아와 공장을 설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먼저 자본회전율이 빠른 업종을 선택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덩샤오핑은 그들에게 ‘애국정신만 있다면’ 그 어떤 종류의 자본가도 더는 착취자가 아니라 중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공헌자가 될 수 있다고 약속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덩샤오핑은 훠궈가 차려진 원형 식탁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오순도순 빙 둘러앉아 남은 이야기를 마저 했다.
상하 구분이 없는 평등한 원형 식탁의 한가운데서 끓는 훠궈 냄비를 둘러싸고 그들은 각자 식성대로 좋아하는 재료를 하나씩 골라 먹으며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날 ‘훠궈 연회’를 마치고 돌아간 옛 원로 기업인들은 곧바로 각자 입맛과 취향에 맞는 ‘자본회전율이 가장 빠른’ 업종을 선택해 공장을 세우고 기업을 만들고 머지않아 ‘가장 먼저 부자가 된’ 기업가가 됐다.
덩샤오핑은 그날 왜 하필 훠궈를 대접했을까? 훠궈는 중국에서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요리 중 하나다. 사실 ‘훠궈 연회’는 덩샤오핑의 머릿속 계획에서 나왔다. 알다시피 훠궈는 보통 동그랗고(또는 사각형의) 커다란 냄비에 여러 종류의 국물을 넣고 펄펄 끓어오르면 각자 좋아하는 재료를 담가 익혀 먹는 음식이다. 요리랄 것도 없는 게, 국물 외에 아무런 가공이 필요 없기에 숙련된 요리사도 필요 없고 각자의 다른 입맛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젓가락 하나만 들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각자 알아서 좋아하는 것을 넣고 먹으면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훠궈를 사이에 두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훠궈를 ‘구동존이’를 상징하는 음식으로 여긴다.
축구를 사랑한 상업제국의 야망가들
쉬밍과 쉬자인은 덩샤오핑의 훠궈를 먹고 자란 개혁·개방 시대의 수혜자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훗날 문혁이 끝난 뒤 덩샤오핑이 ‘훠궈 연회’에서 했던, ‘돈과 사람은 써먹어야 한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새겨들었다. 그들은 1990년대 이후 중국 개혁·개방이 심화하고 본격적인 ‘원시자본 축적기’가 시작됐을 때 자신들에게 기회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곧바로 무역과 부동산, 금융 등 ‘자본회전율이 가장 빠른 업종’을 선택해 중국 민영기업가들의 황금시대라는 귀신파도에 합류해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쉬밍은 고향인 랴오닝성 다롄에서 무역회사를 차리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인맥과 돈맥을 축적하며 자신의 상업왕국을 확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다롄시 최고권력자인 보시라이와 관계 맺기에 성공함으로써 다롄스더 기업을 설립해 굴지의 대기업으로 만들어갔다.
쉬밍과 비슷한 시기에 파도타기를 시작한 쉬자인은 1996년 광저우에서 자신의 기업 헝다를 창립했다. 그는 당시 중국 정부의 주택시장 민영화와 농촌 도시화 정책이 가진 사업성을 포착하고 광저우에서 가성비 좋은 아파트를 지어 시중가보다 싸게 공급해 판매 사흘 만에 완판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뒤 헝다그룹은 부동산개발뿐만 아니라 금융업 등 돈이 되는 모든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며 글로벌 ‘헝다제국’을 구축했다.
쉬밍과 쉬자인은 둘 다 돈도 사랑했지만 축구도 사랑했다. 사실 1980년대 이후 성공한 중국의 주요 기업가들은 축구를 사랑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공한 뒤 기업 이름을 내건 프로축구클럽을 만들거나 기존 축구클럽을 인수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자들이 축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도 권력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축구를 이용해 자신들의 상업제국을 확장하고 싶어 했다.
쉬밍은 1999년 완다그룹이 운영하던 축구클럽을 인수해 다롄스더라는 이름으로 프로축구단을 만들었다. 당시 다롄의 최고권력자인 보시라이가 다롄을 축구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던 강력한 ‘소망’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헝다그룹이 승승장구하던 2010년 쉬자인도 광저우에서 당시 최고 수준의 축구클럽을 인수해 광저우 헝다 축구클럽을 창단했다. 다롄스더 축구클럽을 만든 뒤 쉬밍의 사업은 날개를 더 달아 부동산과 금융, 보험 그리고 의료산업 등까지 대재벌 그룹으로 성장했다. 쉬자인의 행로도 비슷하다.
부패한 냄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다
덩샤오핑을 비롯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모든 지도자는 축구를 이용해 중국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중국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다. 축구도 훠궈와 마찬가지로 여러 측면에서 포괄적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운동 종목이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중국몽’을 제창하기 훨씬 전부터 모든 지도자는 ‘축구몽’을 강조했다. 덩샤오핑이 강조했듯이 ‘애국정신을 가진’ 중국 민영기업가들은 당과 지도자들의 ‘지침’을 잘 새겨들었다. 그 결과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웬만한 도시에서는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프로축구단을 창립하며 중국 사회에 축구 붐이 일었다.
하지만 중국 축구는 민영기업가들이 일으킨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에서는 승부 조작과 도박 축구, 심판 매수 등이 구조화하면서 돈과 권력, 검은 세력의 이익이 공존하는 부패한 훠궈 냄비가 됐다. “(중국) 축구는 사회 병폐의 모든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단면이다. 축구는 사회 전체의 자원을 쏟아부어 끓는 커다란 훠궈 냄비와 같다. 그 안에서는 축구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 거래된다.” 전직 유명 축구평론가이자 중국 축구의 부패 현실을 고발하는 책을 쓰기도 했던 시사평론가 리청펑의 일침이다.
쉬밍은 2012년 3월 구속됐다. 권력투쟁에서 진 보시라이의 몰락과 함께 그의 신화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3년 뒤인 2015년 감옥에서 의문의 병사를 했다. 2023년 9월27일 쉬자인도 사라졌다. 당국의 감시하에 모처에서 구금 중이며 이미 ‘범죄 혐의’로 조사 중이라는 공식 발표도 나왔다. 그들은 모두 ‘지도자의 말에 순종하고, 공산당을 따르며,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걸어왔지만’ 파도타기에 실패했다. 너무 많은 탐욕을 부려 훠궈 속 모든 재료를 혼자 다 먹으려 했을까. 아니면 ‘돈과 사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까.
중국 축구가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무너져갔듯이, 덩샤오핑의 훠궈를 먹고 자란 쉬밍과 쉬자인도 결국 그 부패한 냄비에 빠져 눙차오에 성공하지 못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라는 훠궈를 먹고 자란 차세대 기업가에게는 어떤 파도가 기다리고 있을까.
베이징(중국) 박현숙 자유기고가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