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4억 받고 4.9억 더’… 정부가 문제로 삼은 R&D 예산 사례 보니
혁신성 떨어지고, 연구 목표 불투명하다는 지적 제기돼
고대 철기 문화 연구해 첨단 기술과 융합하겠다는 연구도 있어
中企 기술사업화 사업, ‘혁신바우처’와 중복…전액 삭감
19일 열리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기획재정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선 내년도 예산안에서 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야당에선 R&D 예산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라며 예산 확대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부·여당은 그동안 R&D 예산이 방만하게 운영·관리돼 왔다며 ‘선택과 집중’에 따른 효율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맞설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비즈가 이날 입수한 정부의 ‘R&D 예산 삭감 사례’ 문건에 따르면 교육부의 이공학학술연구 기반구축사업의 연구 과제들이 혁신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지원 종료 수순을 밟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재부에 따르면 대학의 학술연구기반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이공학학술연구 기반구축사업의 예산은 올해 5290억원에서 내년 3927억원으로 25.8% 줄어든다.
특히 이공학학술연구기반구축 사업 중 ‘보호연구 지원사업’에는 올해 예산(274억원)에서 54.9%가 삭감된 123억원만 편성됐다. 2017년 13억원이 배정되며 첫 발을 뗀 보호연구 지원사업은 2022년 예산이 287억원까지 늘었다. 5년 만에 예산 규모가 20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예산은 빠르게 늘었지만, 정작 연구 과제는 R&D 예산에 요구되는 혁신성과 거리가 멀었다”면서 “평균 경쟁률도 1.5:1 미만으로 매우 저조했다”고 삭감 배경을 설명했다.
과학기술혁신본부(혁본)는 보호연구지원사업 중 다수의 연구 과제가 동일한 연구자가 유사한 주제로 타 R&D 지원금을 받았으며, 구체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 어려운 연구과제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A대학의 B교수는 집단 의사 결정 과정을 연구해 ‘합리적인 행위자들의 갈등 조정 프로토콜을 제시하겠다’며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R&D 지원금 명목으로 4억8800만원을 받았다. 이 교수는 유사한 주제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2년 간 과학기술부의 신진연구지원사업을 통해 1억4200만원의 지원금을 수령한 바 있다. 기재부에선 “R&D 예산이 낡은 관행에 따라 ‘나눠먹기식’으로 지급됐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는 평가가 나왔다.
고대 철기 기술을 연구해 첨단 과학기술과 융합해 응용기술을 개발하겠다는 R&D 과제에도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억5000만원의 지원금이 투입됐다. 사학적 관점에서 고대 철기 문화를 연구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를 첨단 과학과 연계해 R&D를 하겠다는 목표는 과도한 면이 있다고 혁본은 평가했다. 게다가 해당 연구의 책임자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전통주조·가공기술’이라는 유사한 연구 과제로 1억5000만원의 정부투자 연구비를 받은 바 있다고 정부 관계자는 덧붙였다.
다학문적 관점에서 전통수학의 진화 과정을 연구하겠다며 1억3400만원의 예산을 받은 연구도 있었다. 이 외에도 고전천문학과 고대 유리제품 분석 등 여러 연구 과제에 각각 1억원 내외의 예산이 지원됐다.
이에 대해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개별 연구과제를 세세하게 들여다 보고 문제점이 드러난 연구 과제에 대해선 지원을 중단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라면서도 “다만 각각의 과제를 깊이 들여다 봤는지는 의문이다. R&D 예산 삭감을 신속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연구과제도 상당수가 삭감 대상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2021년 기준 전체 R&D 과제 7만여건 가운데 규모가 2억원 미만인 과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상회한다”면서 “실제 연구 실적과 관계없이 관습처럼 R&D 예산을 타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R&D 예산은 쉽게 말해 ‘꿈의 예산’이다.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데 집중적으로 쓰여야 한다는 얘기”라며 “지난 정부 5년 동안 R&D 예산이 20조원에서 30조원으로 크게 늘었지만, 과거 4메가 D램 반도체 개발과 같은 파급력 있는 성과 창출은 저조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기재부는 이번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타 사업과 중복되는 R&D 사업도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보건복지부의 ‘감염병 의료안전강화 기술개발’과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 기술사업화 역량강화’ 사업이 거론된다.
정부는 내년 감염병 의료안전강화 기술개발 사업에 올해 예산(144억원)의 절반인 72억원을 편성했다. 정부는 감염병 재난 시 환자 및 의료진의 대응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2022년 이 사업을 신설하고, 첫해 108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코로나 엔데믹으로 해당 연구의 적시성이 저하됐다”면서 “복지부가 하고 있는 ‘범부처 감염병 방역체계 고도화 사업’과도 겹친다”라고 말했다.
올해 39억원이 배정됐던 중소기업 기술사업화 역량강화 사업은 내년에 폐지된다. 사업화가 되지 않은 정부 R&D를 완료하고, 특허 등록 기술을 사업화해 중소기업의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취지의 사업이지만 중기부의 일반 재정사업인 ‘중소기업 혁신 바우처’ 사업과 중복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중소기업 혁신 바우처 사업은 매출액이 120억원 이하인 소기업에 대해 컨설팅과 기술지원, 마케팅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정부가 지난 8월 발표한 2024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도 R&D 예산은 25조9152억원으로 올해 예산(31조778억원)보다 16.6% 감소한다.
다만 정부는 12대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R&D 예산은 전년 대비 6.3% 증액한 5조원을 편성했다. R&D 예산 삭감으로 신진 연구자의 활동이 제약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초기 연구 지원 예산도 5000억원을 배정하며 올해보다 1000억원 늘렸다.
기재부 관계자는 “이름만 R&D 예산일 뿐, 진짜 R&D 사업으로 쓰이지 않은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라며 “나눠먹기와 관행적으로 지원하던 사업 등 비효율적인 R&D는 구조조정하는 대신, 도전적이고 성과창출형 R&D에 대해선 집중 투자하겠다는 게 윤석열 정부의 R&D 구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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