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플라워 킬링 문' 시네마를 지키는 자의 유언

손정빈 기자 2023. 10. 1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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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새 영화 '플라워 킬링 문'(원제:Killers of the Flower Moon)에는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러닝 타임 206분 중 95% 가량이 흐른 지점에서 갑작스럽게 '보드빌'(vaudeville) 시퀀스를 삽입한다. 보드빌은 19세 말 20세기 초 미국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은 일종의 라이브쇼. 이야기가 있고, 간단한 대사와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으며, 극의 맛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효과음과 음악도 들어간다. 연극과 다르고 뮤지컬과도 차이가 있는 이 장르는 시대를 대표하는 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버스터 키턴 같은 무성영화 스타 중엔 보드빌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이들이 꽤 있다. 다만 보드빌 시대는 영화의 탄생과 함께 끝났다. '플라워 킬링 문'에는 바로 이 보드빌 공연 장면이 이야기 흐름과 어떤 관련 없이 등장한다. 해당 시퀀스는 이 작품이 보드빌 공연으로 전달되는 이야기를 영상화했다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스코세이지 감독은 보드빌 배우 중 한 명으로 직접 출연한다.

지난달 말 매거진 GQ는 스코세이지 감독과 진행한 인터뷰를 공개했다. 이 긴 기사 중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건 최근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영화에 대한 거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미국 주류 영화계가 코믹북을 영화화하거나 프랜차이즈 영화를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고, 이런 작품들은 AI가 영화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런 흐름에 맞서 영화인들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9년 마블 영화를 향해 "영화가 아니라 테마파크"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그는 더 나아가 "영화 산업은 끝났다"고도 말했다. 인간과 사회를 깊이 파고들어간 뒤에 그곳에서 본 것들에 관해 풀어내는 예술로서 영화는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바꿔 말해 스코세이지 자신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는 중이며 그런 작품은 이제 '인디'로 불릴 뿐이라는 진단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역작이다. 처음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튜디오인 파라마운트가 제작하기로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결국 수익성이 문제였다. 스코세이지 감독이 원하는대로 영화를 만들려면 막대한 제작비가 쏟아부어야 하는데다가 러닝 타임 역시 길어 수지가 전혀 맞지 않았다. 이 작품 제작비는 스코세이지 감독 영화 중 최대 규모인 2억 달러(약 2700억원), 러닝 타임은 3시간26분이다. 2억 달러는 마블 영화 같은 슈퍼 블록버스터를 만들 수 있는 돈이다. 스코세이지 감독과 파라마운트 간 갈등 끝에 이 작품은 넷플릭스에서 만들어질 뻔 했지만, 역시 투자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플라워 킬링 문'은 애플TV+가 돈을 댄 뒤에야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자기 영화를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지만, 온라인 공개 전 짧은 기간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을 협의해 최소한의 자존심만 지켜낼 수 있었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최근 인터뷰, '플라워 킬링 문'이 제작된 과정을 알고 나면 이 영화의 보드빌 시퀀스는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늙은 보드빌 배우로 자기 영화에 나온 그가 곧 현실의 스코세이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극 중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기한 그 배우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연 장면이 잠깐 나올 뿐이다. 다만 주름 가득한 얼굴, 세버린 머리칼을 보면 이 배우는 아마도 보드빌 배우로 살다가 생을 마감할 거로 보인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1942년생 우리 나이로 81세. 이건 어쩌면 노장의 유언 같아 보인다. 영화에 밀려나 사라지게 될 운명을 가진 매체에 속해 있으나 그런 역사와 무관하게 끝까지 한 자리를 지킨 사람으로 산 무명의 보드빌 배우처럼 자신 역시 시네마라는 장소에서 끝을 맞이하겠다는 다짐 말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분명 영화사를 얘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걸작을 수차례 만들어낸 거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시네마의 최전선에 서서 시대의 흐름에 맞선 전사로 남을 것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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