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무티도 반한 소프라노 여지원… '노르마'로 국내 오페라 첫 주역 무대 기대
‘진짜 내 목소리’ 찾아 유학길 올라
伊서 만난 스승 덕에 자신감 붙어
무티 눈에 띄어 ‘아이다’ 주역 꿰차
여 “카스타 디바 어떻게 부를지 고심
평화롭게 기도하듯이 부르려 해”
지난 6월 어느 일요일 낮 12시쯤, 이탈리아 남부 도시 바리의 오페라(페트루첼리)극장.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의 데스데모나 역을 맡아 연습하고 있던 소프라노 여지원(43)은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하는 알렉스 오예(63) 연출과 로베르토 아바도(69) 지휘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연하던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초초상’ 역을 맡은) 주역 소프라노가 컨디션 난조로 갑자기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됐다. 오늘 오후 4시30분 공연에 대신 출연해줄 수 있겠냐”고 요청한 것이다. 차로 4시간 거리인 로마 극장은 바리 극장 측에도 “비토리아 여(Vittoria Yeo·여지원의 해외 활동 이름)가 정말 필요하다”고 사정하며 허락을 구했다. 여지원이 곧장 택시를 잡고 로마 극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40분. 극장 측은 공연이 지연돼 웅성거리던 관객들에게 “대체 소프라노가 막 도착해 공연을 시작하겠다”고 안내 방송을 했다. 초초상이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여지원은 급히 분장을 하고 의상을 갈아 입으면서 무대 환경과 배역 동선에 대한 설명만 간단하게 들은 뒤 무대로 나갔다.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인 데다 리허설 한 번 못한 채 출연했지만 여지원은 완벽한 노래와 연기로 무대를 장악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엄청난 갈채를 보냈고, 로마 극장과 제작진은 “비토리아 여 덕분에 기적처럼 공연이 잘 끝났다. 정말 고맙다”며 거듭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이 일은 이탈리아 내에서 큰 이슈가 됐고 한동안 회자됐다.
대학(서경대 성악과) 시절 내내 보잘 것 없는 실력에 괴로워하다 ‘가수가 안 돼도 좋으니 진짜 내 목소리를 한번 찾고 나서 끝내고 싶다’는 일념으로 2005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던 여지원에겐 고국에서 첫 주역 오페라 무대에 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유학을 가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한참 헤맨 그는 2009년 모데나 음악원에서 불가리아 출신 소프라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89)를 스승으로 만나면서 달라졌다. “소심한 성격에다 늘 테크닉(기교) 향상 방법만 고민하던 제게 선생님이 ‘내가 너를 뽑은 건 다른 사람이 안 갖고 있는 게 보여서 뽑은 거야’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셨어요.”
이후 더 부지런히 실력을 연마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던 그에게 2015년 뜻밖의 기회가 왔다. 2013년 오페라 연출가인 아내(크리스티나 무티)의 작품에 출연한 여지원을 눈여겨 본 거장 리카르도 무티(82)가 잘츠부르크 축제 무대에 세운 것이다. 무티 부부 역시 카바이반스카처럼 여지원에게 “이탈리아 가수보다 발음과 전달력이 더 좋고 특별한 게 있으니까 뭔가 더 잘 하려 애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격려했다. 그렇게 여지원은 2017년 잘츠부르크 축제에선 베르디 ‘아이다’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이 축제에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을 맡은 건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세계 주요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며 이름을 날렸다. 올해와 내년에도 ‘오텔로’와 ‘맥베스’, ‘투란도트’와 ‘나비부인’, ‘아이다’ 등 굵직한 작품들의 주역을 맡았다. 오랫동안 자신과 싸우며 인고의 세월을 견딘 끝에 이름처럼 ‘승리의 여신(비토리아)’이 된 것이다. 여지원은 “가톨릭 세례명인 ‘비토리아’를 사용한 건데, 이름이 가진 힘이 되게 좋다”며 웃었다.
‘노르마’는 과거 이탈리아 5000리라 지폐에 벨리니의 초상화와 함께 등장할 만큼 ‘벨칸토 오페라’(화려한 기교와 창법을 중시하는 오페라)의 대표작이다. 또 성악가들의 기량이 최고 수준이어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작품이라 자주 공연되진 않는다. 아바도 지휘자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기량이 뛰어난 성악가를 캐스팅할 여건이 안 된다면 공연하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빼어난 가창력과 연기력, 무대 장악력을 모두 갖춰고 극을 이끌어 가야 하는 노르마 역 소프라노의 기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19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처음 ‘노르마’(크리스티나 무티 연출)에 출연한 후 이번 공연이 두 번째인 여지원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그동안 감정을 폭발시키는 극적인 역할을 주로 맡아온 그는 “노르마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노래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 굉장히 어려운 역할”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노르마는 민족과 종교 지도자여서 인간적인 감정을 버려야 하는데 적의 장수를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배신당하는 등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다”며 “감정을 억누르면서 내면에 있는 강한 힘을 표현해야 노르마의 권위가 살 것”이라고 했다.
여지원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누르고 평화롭게 기도하듯 부르려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 그는 ‘노르마’의 진가를 세상에 알린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 미국)나 몽세라 카바예(1935∼2018, 스페인) 등 명가수들의 생전 공연 장면도 챙겨봤다. “예전 가수들의 표현 방법을 찾다 보면 ‘이 사람은 정말 노르마 자체였어’ 하는 가수들이 있는데, 그분들 연주가 저한테 많은 팁(도움말)을 줍니다.”
‘노르마’는 가수들에겐 어렵고 힘든 작품이지만 관객은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금지된 사랑과 배신, 질투, 종교, 전쟁 등 다양한 소재가 극적으로 펼쳐지는데, 오예 연출이 극의 배경과 결말도 파격적이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여지원은 “노르마가 겪는 감정의 혼란을 쭉 따라가면 재밌게 볼 수 있다”며 “지금도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지루할 틈이 없다”고 소개했다.
아바도 역시 “‘노르마’에선 종교와 문화, 힘이 다른 세력 간에 대조를 이룬다. 강자는 침략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도 닮아 있다”고 보탰다.
여지원과 이탈리아 최정상급 소프라노 데시레 랑카토레가 노르마를 번갈아 연기한다. 노르마와 삼각관계를 빗는 어린 여사제 아달지사 역은 메조 소프라노 테레사 이에르볼리노, 로마 장군 폴리오네 역은 테너 마시모 조르다노가 각각 맡는다. 노르마의 아버지 오로베소 역에는 베이스 박종민이 출연한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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