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반도체 ‘발목잡힌 중국투자’, 불행만은 아니다
반도체 전쟁을 말하는 ‘칩워’는 21세기 경제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뿐만 아니라 첨단 산업을 향한 각국의 경쟁을 상징하는 열쇳말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국제정치의 패권을 정한다는 ‘기정학’(techno-politics) 시대를 맞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전략을 돌아봅니다. ‘반도체 삼국지’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가 3회에 걸쳐 정리합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칩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와 나는 올해 두 차례 대담을 했다. 국내에서 열린 통상법무포럼(6월)과 세계지식포럼(9월)에서다. 사실 포럼 개최 전에 온라인 미팅을 수차례 했기 때문에 크리스 밀러 교수와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할 수 있다.
칩워는 1945년 미국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가 반도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최근 미-중 반도체 전쟁까지 다룬 책이다. 오늘날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의 알력 다툼 등을 다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밀러 교수의 주 전공은 국제 정치 및 정치사다. 특히 구소련의 정치사·산업사가 그의 주요 연구 주제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7년간 공부하면서 자료를 수집·정리했다고 한다. 연구 동기는 구소련 붕괴 과정에서 그 나라의 산업 경쟁력이 왜 미국보다 뒤처지게 되었는가부터 시작한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구소련의 붕괴 과정을 산업 경제사 관점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논문에도 나타나듯, 실제 구소련이 체제를 반 세기 정도밖에 존속시키지 못하고 붕괴된 까닭 중 하나는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 미국과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의 기술 경쟁력과 다양성이라는 양쪽에서 구소련은 미국에 뒤처졌다.
경쟁력 격차가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진 지점은 바로 반도체 산업 분야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반도체 산업에서 본격적인 기술 혁신 동력으로 등장한 집적회로(IC) 양산 과정에서 구소련은 핵심 기술 확보에 실패했고, 이는 1980년대 컴퓨터 산업의 기술 격차로 이어졌다. 밀러 교수와 나는 대담을 나누며 한 가지 공통된 의견을 도출했다. 반도체 칩 양산 공정이 다름 아닌 정밀 화학 공정 산업과 장치 산업이 겹친 분야이기 때문에 생산 장비의 고도화와 표준화가 열쇠였다는 점이다.
한국 반도체는 ‘칩워’의 인질일까
그렇지만 칩워에서 드러난 밀러 교수의 현대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는 아쉽게도 제한적이었다. 그의 한계는 산업에 대한 디테일의 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디테일을 엮는 연결 고리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지만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 수준을 넘기 위해서는 각 세부 산업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디테일이 엮여 있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산업에 관여하는 밸류체인(value chain)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분야의 산업기술에 대한 영향력 측면에서, 심지어는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복잡하게 엮인 구조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앞으로의 변동이 이 맥락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를 이해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칩워 출판 뒤 그의 책은 미국은 물론 아시아권, 특히 반도체 산업에 대해 국가적으로 관심이 지대한 한국, 대만, 일본 등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래서인지 동아시아 각국에선 밀러 교수를 각종 포럼에 모시려 혈안이었다. 세 나라 미디어 곳곳에선 그의 인터뷰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대개 자국 반도체 산업이 앞으로의 국제 정세 변화, 특히 미-중 갈등 구조 속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을 것인지 밀러 교수의 의견을 물어보고, 자국 반도체 산업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특약 처방과 향후 전망을 구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그렇지만 밀러 교수가 내놓은 대답은 대개 천편일률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각국이 가지고 있는 반도체 경쟁력의 근거와 그 근거가 앞으로 어떤 변동에 처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그의 통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는 각국에 대한 맞춤형 처방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의 최근 대담에서 밀러 교수가 중국에 있는 한국 반도체 회사들의 팹(반도체칩 생산시설)을 두고 ‘D램 시설의 인질화’까지 언급한 것은 아쉽다. 미-중 패권 경쟁이 촉발한 전환기 속 한국의 반도체 산업의 1차적인 불확실 요소 중 하나인 중국에 있는 한국 메모리반도체 회사들의 팹의 상황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극단적인 수준까지 비화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미-중 갈등이 더 격화하기 훨씬 전부터 중국은 반도체 산업에서의 자급화(혹은 내재화)를 제12차, 제13차, 그리고 최근의 제14차 경제 계획의 주요 이슈로 꾸준히 설정했다. 특히 ‘반도체 굴기’, ‘중국제조 2025’ 등의 기치를 내세우며 여러 반도체칩 중에서도 범용 반도체인 메모리반도체의 자급화를 우선적인 목표로 천명했다.
또한 중국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독일 등 기존의 제조업 강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많은 제품의 국산화 대체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중국의 제조업 내재화 정책이 지속될 경우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될 나라는 한국, 독일, 일본이다. 중국 반도체 시장이 커진다고 해서 과거 2000∼2010년대처럼 중국 시장으로부터의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한 시나리오가 아니게 되었다.
다만 미-중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그 시점이 예상보다 더 이르게 다가왔을 뿐이다. 이는 불행만은 아니다. 중국 현지 투자가 더 많이 이뤄지기 전에 불확실 요소로 작용했던 카드 하나가 먼저 테이블 위에서 공개되면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환기 속 한국 반도체 산업 전략은?
현재로서 중국 현지에서 운영 중인 한국 메모리 팹의 가장 적합한 대응은 자연스러운 감가상각을 거쳐 팹의 전용(transform) 혹은 일부 이전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 현지 메모리 팹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보통의 정보통신(IT) 기업과 달리, 반도체 팹은 라인 하나에 천개가 넘는 장비가 들어가며 이들의 가치는 도합 수조원, 수십조원에 이른다.
이들 반도체 생산·패키징·검사 장비는 다른 중화학 공업 혹은 장치 산업의 장비와 달리 감가상각률이 높다. 이는 장비를 24시간 365일 가동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계속 성능이 발전하는 반도체 칩 생산을 위한 장치 업그레이드 주기가 다른 산업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새로운 모델을 출시한다고 해서 장비를 교체하거나 아예 라인을 갈아엎는 일은 드물다. 물론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가는 혁명적인 변화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그 빈도는 드물다. 대개는 산업용 로봇을 새로 교체하거나 용접기를 새 모델로 교체하는 정도로 생산 시설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이 주기조차 모델 교체 주기와 항상 연동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 반도체 산업에선 칩 업그레이드가 신규 장비 도입을 동반한다. 새로운 칩 생산을 위해서는 장비도 그만큼 성능이 개선돼야 하는데, 부분적인 업그레이드보다는 아예 새로운 세대의 장치를 들여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반도체 산업에서는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막대한 장치 교체 비용(장비 가격×장비 대수)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현금 흐름이 확실하고 꾸준해야 한다. 현금 흐름이 일시적으로 안 좋아질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유보 현금도 충분히 쌓아둬야 한다. 현금 동원이 불확실해지면 장비 교체 주기를 놓치게 되고, 그러면 칩 업그레이드 시점을 놓치게 돼 시장지배력이 떨어진다. 이는 다시 미래의 현금 흐름에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되므로, 결국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중국 공장에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도입이 어려워진 한국 업체들의 과제다. 다음 글에서는 이 과제 해결을 위한 방안에 대해 논하겠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화학공학부, 반도체융합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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