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 1호’부터 ‘현역 전설’까지…항저우APG 208명의 도전
친구 따라 강남 가길 잘했다. 김민호(23)는 초등학생 때 친구 따라 동네 문화센터 체스 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64칸 흑과 백의 전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퇴화하는 병이 있어 혼자서는 양치질조차 버거운 그였으나, 체스판에서는 달랐다. 그는 기민했고, 빼어난 전략가이자 담대한 장수였다. ‘체크 메이트’의 즐거움이 그의 일상을 고양했다. 정복자 알렉산더와 대장군 한신이 부럽지 않았다. 국내가 다소 좁다고 느껴질 무렵, 기회가 왔다. 김민호는 한국의 첫 장애인 체스 국가대표가 됐다.
오는 22일부터 28일까지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장애인아시안게임에 한국은 345명의 선수단(선수 208명·임원 137명)을 파견한다. 전체 22개 종목 중 21개(시각축구 제외)에 선수를 냈는데 여기에는 한국이 처음 출전하는 종목도 네 개(바둑·체스·카누·태권도)나 된다. 김민호 역시 체스를 위해 ‘모셔온’ 선수다. 박종철 선수단 총감독은 지난 13일 결단식 기자회견에서 “장애인 스포츠에서는 생소한 종목이었다. 비장애인 단체인 대한체스연맹에 등록된 선수가 한 명 있어서 참가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생애 첫 국외 대회이자 국외 여행을 앞둔 김민호는 두려움 반 설렘 반이다. 한국에서는 비장애인 선수들과 공식 대결에서도 최근 몇 년간 패배한 기억이 없고, 특히 오프닝(바둑의 포석과 비슷한 체스 경기에서 초반 기물 이동)에 대한 해박함은 추종을 불허할 만큼 실력이 출중하지만, 체력이 관건이다. 3박4일 동안 하루 두 판씩 강행군을 치러야 하는데 김민호에게는 해본 적 없는 도전이다. 13일 이천선수촌에서 만난 그는 “제 몸의 특성상 체력을 키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신력을 단련하고 있다”라며 웃었다.
한국 선수단에는 김민호처럼 미지의 시험대에 선 이도 여럿이지만, 세계 정상 문턱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도 적지 않다. 그 간판 중 한 명은 탁구 김영건(39·광주시청)이다. 2002년 부산 대회(당시에는 아시아태평양장애인경기대회)를 시작으로 이번 항저우까지 여섯 번째 장애인아시안게임을 앞둔 그는 장애인탁구계에서 자타공인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패럴림픽에서 세 번 금메달(2004·2012·2016)을 목에 걸었고, 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는 2014년과 2018년 연달아 2관왕(개인전·단체전)을 했다.
장애인 스포츠에서는 장애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세부 등급을 매겨 경쟁의 울타리를 설정한다. 격투기의 체급과 비슷한 개념이다. 탁구에서는 11개 등급이 있는데 김영건은 휠체어를 타고 겨루는 ‘클래스4’에 속한다. 다시 말해, 남자 클래스4에 관한 한 김영건은 20년 넘게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코치들이 말릴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하는데, 운이 좋게도 부상이 없었다”라고 담백한 비결을 전하면서도 “최근 세계랭킹이 2위로 떨어졌다. 이번에 항저우에서 다시 뒤집을 것”이라고 각오를 보탰다.
앞선 아시안게임과 마찬가지로 5년 기다림 끝에 결전의 땅으로 향하는 한국 선수단의 기세는 등등하다. 지난해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일구며 28년 만에 패럴림픽 본선 진출을 결정지은 골볼(시각장애인을 위한 단체 구기 종목) 여자 대표팀의 주장 김희진(28·서울시청)은 커리어 15년 만에 첫 아시아 정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세 번째 장애인아시안게임인데, 아직 메달을 걸지 못했다”라며 “상대가 던진 공을 하나하나 막으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번 대회에서도 늘 그랬듯 몸이 부서져라 다 막(맞)고 오겠다”라고 했다.
패럴림픽 9연패 역사를 이어온 보치아(중증장애인을 위한 구기 종목) 대표팀 역시 준비를 마쳤다. 임광택 보치아 감독은 “지난 9월 이천선수촌에 저희 전용 경기장이 생겼다. 감독들이 선수들 동기 부여를 어려워하는데 경기장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됐다”라며 “야간 훈련 하지 말래도 저녁, 새벽 가리지 않고 훈련하러 나온다. 항저우에서 전용 경기장 덕을 크게 볼 것 같다”라며 자신감을 밝혔다. 자기에 대한 믿음과 각오를 안고 선수단은 18일 현지에서 입촌식을 열었다. 이번 대회 목표는 종합 4위다.
한편,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5년 만에 국제대회 모습을 드러냈던 북한은 장애인아시안게임 불참을 결정했다. 북한은 2021년 세계반도핑기구(WADA) 규정 위반으로 국제대회에서 인공기 게양을 금지 당했는데, 아시아패럴림픽위원회(APC)가 이 징계를 준수할 것을 요청하자 내린 결정이다. 앞서 아시안게임 기간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묵과 속에 인공기를 건 바 있다.
이천/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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