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탐사] 지독했던 고산증… 팀플레이로 이겨내다
'브룸캉체’ 등반… 유메소둥~윰탕밸리 트레킹
시작은 우연이었다. 우연히 누군가 오지탐사대 활동을 소개해 주고, 우연히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우연히 '나도 도전해 볼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 우연의 순간이 겹쳐 그 위에 내 간절함이 얹어진 순간, 오지탐사대를 향한 꿈은 필연이 되었다. 6주간 국내 각지 산을 오르며 탐사를 위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7월 22일 드디어 출발하게 된 인도. 하지만 탐사 첫 발부터 쉽지 않았다.
인도 타임을 들어보셨나요?
인도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탑승 예정이었던 인도행 항공편이 결항되어 공항에서 10시간을 대기했다. 결국 태국을 경유해 인도 콜카타로 향하는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인도는 테러 사건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건물과 교통시설, 호텔조차도 금속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몸수색이 필요했다. 험난한 비행기 환승 과정과 입국 심사과정을 통과한 후 공항에서 에이전시 사장 고팔Gopal을 만났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오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인도로 향하는 과정이 반가움을 깊게 만들어줬다.
고팔은 먼저 준비해 두었던 흰색 천을 우리들의 목에 둘러주며 인사를 했다. 이 천은 '카닥'이며 티베트 문화에서 정을 표시하거나 존경심, 환영 등의 의미라고 한다.
인도 타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도 사람의 약속은 점이 아니라 선의 개념이다. 약속시간이 지난 후 적어도 10분, 많게는 1시간 이후 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약속시간이 7시였다면 7시 10분에 올 수도 있고 7시 40분에 올 수도 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모르지만 모두들 별 문제없이 기다린다.
실리구리로 우리를 데려갈 버스 또한 그랬다. 7시 도착 예정이었지만 7시 40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우리도 별 문제없이 버스를 탔고, 13시간 동안 콜카타로 향했다.
인도에서 운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도로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엄청난 경적소리와 중앙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며 차를 모는 사람들. 그 사이 도로 위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소들, 자유롭게 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을 마치 자동차 운전게임처럼 노련하게 피하며 운전해야 한다. 현란한 운전 실력을 뽐내는 택시 기사를 보며 인도 운전자는 굉장한 숙련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휴게소에 들러 저녁과 아침을 먹었다. 인도에서 처음 먹은 현지식은 달밧과 치킨 카레, 짜이였다. 잠결에 일어나서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꽤 맛있었다. 버스 경적소리와 매연, 기나긴 대중교통 이용으로 지친 대원들은 밥 먹는 것도 힘들어 했다.
그렇게 13시간의 버스 탑승을 끝내고 보니 다리와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마 장시간을 앉아 있으니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여름에도 털옷 입고 비니 써야
시킴Sikkim 지역은 인도 내 자치 왕국이다. 출입을 위해서는 허가증이 필요하다. 허가증을 받고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시킴 강톡Gangtok에 도착했다. 드디어 카고 가방을 풀고 제대로 휴식할 수 있는 곳이다. 푹신한 침대를 보자마자 침대로 뛰어올라 폭 안겼다. 각자의 방에 카고 가방을 던져 놓은 뒤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시킴 정부 인사와 기자가 왔다. 시킴 주에 한국 오지탐사대가 왔다니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우리 팀을 소개하고 탐사목적과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아직 갈 길은 더 남아 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인도 국경에 가깝게 위치한 히말라야산맥의 브룸캉체Brumkhangse(5,635m)다. 준비를 갖춘 후 또 다시 6~7시간을 들여 근처 도시 라충Lachung으로 이동했다. 강톡은 해발 1,700m. 산 중턱에 도시와 상점이 위치해 있기에 모든 길이 산길처럼 구불구불한 1차선 도로였으며 오르막 혹은 내리막이었다.
인도는 6~8월이 우기다. 그러나 한국의 장마철처럼 강수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반짝이는 햇살에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이 뜨거워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을 몰고 와 거친 비를 사정없이 퍼붓곤 하는 변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곤 한다. 이런 날씨는 지반을 약하게 하고 산사태로 이어진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은 비포장도로에다가 산사태도 몇 번 일어났는지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교통사고로 인한 교통체증도 있어 멀미와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대원도 발생했다.
그렇게 7시간을 달려 라충 숙소에 도착했다. 라충에서 우리가 묵은 숙소는 해발 2,900m여서 여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추웠다. 우리는 고도가 올라갈수록 기온이 낮아지고, 낮아지는 체온과 산소포화도로 인해 신체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비니와 털옷을 착용하고 잠 들 때도 침낭 안에 들어가서 전기장판을 틀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해야 했다. 또 아침에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고산병으로 보낸 4일… 모든 것이 역겹다
'고산병이 오면 많~이 드셔야 합니다.'
대장님의 75L 배낭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는 문구다. 고소 적응을 위해 윰탕밸리Yumthang valley부터 쉬브만디르shiv mandir 베이스캠프(3,900m)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뛰는 것도 아닌데 숨이 가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온몸이 몸살에 걸린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 이게 고산병인 건가?'
쉬브만디르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긴 오르막길이 도상거리보다 두 배로 느껴졌다. 캠프에 도착에서 휴식을 취해도 마찬가지였다. 성준, 치형 대원은 아예 낯빛이 변했다. 또 하나, 둘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비를 맞고 체온을 뺏기니 증세는 더더욱 심해졌다. 몸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식사 전후, 아침저녁으로 쉴 틈 없이 생강차를 마셨다. 아마 평생 마실 생강차는 이곳에서 다 마신 것 같다.
점점 고산병이 심해진 나는 음식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향이 있는 모든 것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하고 인도 음식도 꽤 맛있다며 즐겼는데 이렇게 변화할 줄 누가 알았을까. 구토를 하더라도 밥은 먹어야 힘이 난다고 하시는 대장님의 말씀에 다시 숟가락을 잡고 한술 떠 입으로 억지로 넣었다.
고산증세가 4일 동안 지속되니 점점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순간이 추웠고 작은 움직임에도 숨이 가빠 왔으며 낮에는 두통, 밤에는 구토증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소약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매일 저녁시간 1시간 전 탐사일지를 적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는데, 저녁을 먹지 않았음에도 저녁을 먹었다고 적었으며 전일 먹은 메뉴를 오늘 먹었다고 써놓기도 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바람에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근처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스태프가 끓여준 생강차를 마시며 야생 소, 말, 개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아침 하늘을 멍하니 보기도 하고, 평소 좋아하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괜찮아"라고 스스로 되뇌며 하루를 시작했다.
"팀이 아니면 의미 없다"
쉬브만디르 베이스캠프에서 5일을 보내고 우리 팀은 전진베이스캠프ABC(4,540m)로 출발했다. 그러나 나와 이치형 대원은 고산병 악화로 올라가지 못했다. 대신 대장님께서 두고 가신 무전기로 매시 정각마다 3분가량 교신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무전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 무전이 가능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무전이 잘 들린 곳은 식당 텐트 제일 안쪽 자리. 저녁 7시 그곳에서 처음 들은 말은 "준형이 상태가 좋지 않아"였다. 심장이 철렁했다. 그렇게 다음 교신을 기다린 지 1시간, 대장님과 우리 측 가이드는 "다음날 오전 8시에 모든 인원이 베이스캠프로 내려올 계획"이라고 했다. 걱정과 아쉬움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렇게 다음날 2팀으로 나눠 팀원들이 내려왔다. 제일 처음 내려온 준형이와 부대장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감에 옅은 웃음이 났다. 이후 대장님과 나머지 대원들이 안전히 하산을 마치자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고작 하루 보지 못했을 뿐인데 3일은 못 본 것 마냥 반가웠다. 부상자 없이 내려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팀은 전진베이스캠프까지 진출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올라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미 대원 3명의 상태가 악화됐고 계속되는 거친 비로 인해 사고위험이 컸다. 팀 전체가 아닌 몇몇 인원만 추려 정상에 올라서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대장님의 판단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쉬브만디르 베이스캠프 근처에서 트레킹하며 보냈다.
렙차 페스티벌에 참가
인도 시킴 지역은 크게 3개의 민족이 살고 있다. 렙차Lepcha족, 부티아Bhutia족, 네팔리Nepali족이다. 사람들은 강톡의 렙차 페스티벌에서 각자의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그들의 축제를 즐긴다.
이 지역은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생분해되는 소재의 비닐봉지를 사용하고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도 않는다. 이 같은 정책은 시킴 주의 유기농 농산물 재배 특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이 축제 또한 환경의 날, 쓰레기 없는 시킴을 기념하기 위한 의미라고 한다.
축제 이후 호텔 근처에 있는 타둥첸 학교Tathangchen Secondary School를 문화교류를 위해 방문했다. 전교생이 100명 남짓한 작은 학교였는데 전교생이 학교 옥상에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당초 30명만 문화교류 대상으로 선정하려 했으나 전통의상을 예쁘게 차려입고 설레는 미소로 우리 팀을 바라보는 100명의 빛나는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팀을 나누어 이들 전부를 데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게임을 진행했다. 마이크도 없고 무너질 위험이 있어 뛰어서도 안 되는 환경이지만 아이들은 나의 진행을 잘 따라주었다. 타둥첸 학교에서는 전통 과자 만들기 체험, 유치원 교실 방문, 민족별 전통 춤 공연을 해주었고, 우리가 직접 인도 민족의 전통 옷을 입고 춤을 춰 보는 활동으로 문화교류를 마무리했다.
인도를 떠나기 전 고팔의 딸에게 그림과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Depends on what you see it당신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지겹도록 내리던 비와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 아름다운 풍경, 그 속에 여러 가지 시행착오들.
박준형 대원의 뱃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지만 함께 웃으며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정상은 가까워져 간다. 힘든 여정에 잠깐 숨 돌리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곁들이다 보면 어디선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깃들어오고 또다시 툭툭 털며 일어난다.
보고 느꼈던 경험 하나하나가 반짝이는 추억이라면 그 추억이 앞으로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 기억 상자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고 그 별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내일을,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 탐사대는 항상 함께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하며 탐사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입가에 비장한, 후련한 미소를 머금고.
"시키면 한다! 가자 히말라야! 브루밍 파이팅!"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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