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연인’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송길호 2023. 10. 19.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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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 문화평론가
국가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걸까. 그리고 그건 어떤 효용가치와 한계를 지닐까. tvN 토일드라마 ‘아라문의 검’은 판타지를 통해 그려낸 국가의 탄생기를 문화인류학적인 바탕을 통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일단의 답을 제시해준다.

먼저 청동기 무기 기술을 갖게 된 아스달이라는 문명이 그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들을 침략, 약탈하는 정복전쟁을 벌이고, 그러자 이 부족들이 연맹을 해 아스달과 맞서는 이야기가 바로 ‘아라문의 검’이다. 시즌1에 해당했던 ‘아스달 연대기’에서는 문명이 어떻게 자연 속에서 그 이치에 따라 살던 이들을 핍박하고 약탈해 덩치를 키워가는가를 그렸다면, ‘아라문의 검’은 그 자연 속에 살던 이들마저 아스달에 노예로 끌려온 후 그 문명의 맛에 변화해가는 과정 또한 담는다.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질러 이미 시작된 문명은 그래서 결코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 문명의 맛을 본 이들은 그 속에서 저마다 더 큰 부와 권력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문명은 끝없는 전쟁과 약탈을 밑바탕으로 커져간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보다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이 필요해진다. 적어도 부족 간의 전쟁과 약탈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강력한 국가가 요구되는 것. 물론 이렇게 탄생한 국가는 또 다른 국가와의 더 큰 전쟁을 예고하지만, 적어도 국가라는 틀 안에서는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통해 질서가 유지된다. 그런데 빠른 문명으로 청동기 기술에서부터 이제 철기

기술 까지 갖춘 아스달이 그러한 무력 하나로 유지되지 못하고 또 국가로 성장할 수 없다는 걸 이 드라마는 이들과 맞서는 세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칼과 방울 그리고 거울의 상징인 세 아이들이 한날한시에 태어나 결국 이 세상을 끝낼 것이다”라는 신탁에 등장하는 이 세 아이들은 각각 칼을 상징하는 은섬(이준기), 방울을 상징하는 탄야(신세경) 그리고 거울을 상징하는 은섬의 배냇벗(쌍둥이) 사야(이준기)다. 이 세 인물들은 각각의 위치에서 자라나 아스달을 무너뜨리고 새 세상을 열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제대로 정비된 국가의 탄생을 말해준다. 여기 등장하는 칼과 방울 그리고 거울은 각각 물리적인 무력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종교의 힘 그리고 부와 더불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이나 정치력을 상징한다. 즉 국가란 무력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고 국민들을 결집시키고 위로, 위안해줄 수 있는 종교 같은 정신적인 힘은 물론이고, 타인들이 국가라는 범주 안에서 하나의 국민이라 여기게 해주는 포용력이나 정치력이 요구된다.

이미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칼과 방울 그리고 거울의 의미는 현재까지도 국가에 대한 질문 앞에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다. 즉 국가의 기본적인 존립 기반은 역시 칼로 대변되는 힘이 아닐 수 없다. 무력이든 경제력이든 힘이 밑바탕 돼야 일단 외세로부터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독재이자 폭압이 된다. 생명과 영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킴으로써 하나로 결집시켜주는 현대적 의미로서의 방울이라 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필요하고, 나만이 아니라 타자를 인정하고 그래서 외부 문화나 문명에 대해서도 열려있는 현대적 의미로서의 거울이라 할 수 있는 공감능력 또한 필요하다.

한편 최근 파트2를 시작한 MBC 금토드라마 ‘연인’ 역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으로, 국가의 존재이유를 국가 부재가 만들어내는 백성들의 비극을 통해 그리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났지만 이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는 백성들에게 참혹한 결과로 이어진다.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죽지 못해 살아간다. 참다못해 도주했다 붙잡혀온 조선인들은 짐승처럼 발뒤축이 잘리고, 여인들은 저들의 노예로 팔려가 노리개가 되거나 질투한 상전에게 팔이 잘리고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는 참혹한 처지가 된다. 또 도주한 조선인들을 다시 잡아오라는 청나라의 압박에 의해 인조(김종태)는 이들에게 자복하고, 그들을 숨겨주는 자들 역시 엄히 죄로 다스리겠다는 방을 붙인다.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연인’은 파트1에서도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남한산성에 유폐된 왕을 선비들이 나서 구하자고 하자, 주인공인 이장현(남궁민)이 반대하는 대목이 나온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하였는데 왜 백성이 임금을 구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 질문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조선시대와 현재의 달라진 관점을 보여준다. 실제 조선시대의 상황이라면 그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왕을 먼저 구하는 것이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 일이라 여겼을 터다. 하지만 조선을 배경으로 하곤 있어도 현재의 관점이 투영된 사극 ‘연인’은 주인공 이장현을 통해 지금의 관점을 드러내준다. 나라가 있어야 백성도 있다는 조선시대적 관점과는 다른, 백성이 있어야 나라도 있다는 현재적 관점이 그것이다.

현재 세계정세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장기화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최근에는 중동에서도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 하마스의 갈등이 극한으로 고조되면서다. 이스라엘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이번 기회에 가자지구를 점령하려는 의지를 드러냈고, 여기에 하마스 역시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전쟁은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만일 전쟁이 본격화되면 레바논 헤즈볼라와 이란까지 가세될 것으로 보여 중동 다른 지역으로까지의 확전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다. 모든 세계가 연결돼 있는 현시대에 전쟁이란 국지전의 차원을 넘어 모든 국가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국내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암담하다. 민생은 사라지고 당파적 대결만 첨예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연인’이 보여주는 국가 부재가 만드는 비극들은 그저 사극 속에서나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그것이 이미 병자호란이라는 실제 역사 속에서 분명 벌어졌던 일들이라는 걸 되새겨볼 시점이다.

송길호 (khsong@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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